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가 역자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매끄러운 번역으로 20세기 걸작 <구토>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해 출간하는 국내 완역본이다. 나는 이 책의 편집자로 제작에 참여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사르트르는 유명해도, 사르트르를 읽어본 이는 드물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 지성, 작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지만, 명성과 인기에 비해 그의 저작, 특히 그의 문학작품은 대중들에게 의외로 낯설다.
사르트르를 작가로서 세상에 알리고 자리매김하게 해준 그의 첫 장편소설 <구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계문학선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며, 고교생 필독서로, "20세기를 만든 책"으로, 현대고전으로 늘 손꼽히는 작품이지만 주변에서 <구토>를 읽어봤다고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구토>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근저를 이루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 그래서 난해하고 '비의적이다'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점이 무관하지 않을 터.
사르트르의 <구토>를 누가,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사르트르 전문가 변광배(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에게 직접 물었다.
<구토> 읽어본 사람 어디 없어요?
- 편집자의 욕심으론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뗀 모든 분이 <구토>(에디터스 컬렉션)를 읽어주셨으면 좋겠지만, 고전임에도 의외로 이 작품을 읽어본 이가 적어서 놀랐습니다. <구토>는 사르트르의 분신이라 일컬어지는 주인공 로캉탱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삶과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외따로 떨어지기를 자처하는 고독한 지식인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는데요. 자연스레 로캉탱처럼 자신의 삶과 존재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작품을 어떤 독자에게 권하고 싶으신지요?
"고전을 읽는데 그 대상을 '누구'로 한정하는 것이 가능한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모두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존의 문제는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멀리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보통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에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까요.
그런데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위기를 맞게 되지 않나요? 그것이 청년 시절에 올 수도 있고, 더 나중의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실존의 위기 상태가 바로 '구토'의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집단의 위기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 위기의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사회에 나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청년 시절에 삶과 존재의미에 대해 한번 고찰해보는 차원에서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 교수님께서는 청년 시절에 <구토>를 읽어보셨군요. 그때와 지금의 감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과거에 <구토>를 읽었을 때 작품에 더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어서 민주화 등의 사회적인 문제와 제 개인의 미래를 계획하는 문제가 맞물려 있었거든요.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읽었다면 아마 저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네요.(웃음) 문학을 전공하거나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둔 일반적인 대학생, 청년이었다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지만 포기했다면 삶과 실존의 참다운 의미를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몸에 좋지만 입에 쓴 약을 피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짜'에 대해서, 진정한 삶과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는 측면에서 살면서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어렵다는 '구토', 어떻게 읽을까?
- 교수님께서도 읽다가 포기했을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니 위로가 되면서 어쩐지 다시 한번 <구토>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정독하고 싶은 의지가 솟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구토>(에디터스 컬렉션)는 故 방곤 교수님의 번역으로 1983년 출간된 이후 약 40년 만에 문학 전문번역가 임호경 선생님의 유려한 번역으로 새롭게 선보이게 되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작품,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저는 문학을 '그것만이 다가 아닌 것(pas-toute)'로 이해합니다. 라캉의 의미에서 '상징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아니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인간의 욕망은 현실 세계의 '법', '체계', '언어', '상징' 등으로 다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그 너머의 의미를 포획하는 것, 부조리한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며 문학의 부정성이라 이해합니다.
또 <구토>는 느리게, 더디게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특징 중 하나가 '느림'이지요? 그건 '자기'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삶, 실존의 과정은 길고 순탄하지 않기에 그런 만큼 인내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문학에 대해 흔히 말하는 '무용(無用)의 용(用)', 무용한 것의 쓸모입니다."
- 삶, 실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대해 줄곧 강조해주셨는데요. 한국의 청년들은 취업이나 생계문제에 내몰리거나 경쟁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소비'나 '취향'에서 찾는 모습도 흔히 보입니다. SNS를 통해 자신의 '소비행태'나 '취향'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공유하는 활동 자체가 마치 자신의 오리지널리티 표현, 하나의 창작 활동처럼 여겨지며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비되기도 하지요. 이런 현대인의 정체성 표현을 사르트르가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요?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모든 선택을 각자에게 맡길 겁니다. 자유와 더불어 책임을 강조하는 전략인 셈이지요. 저는 요새 젊은이들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지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더 영리하고 명민하죠. '자기실현'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저 바쁜 것이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더 빨리 소유하고 이루고 싶어 해요. 해서 편리한 방식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적인 방식을 생각하다보니 소비, 취향도 자기실현의 한 방법이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자기 인격을 투사합니다. <구토>에서 개념을 빌려오자면 그것이 소비이든, 취향이든 진지함, 성실함, 진정성을 담으면 되는 것이지요. '라테 타령'인지는 모르겠으나 '독 짓는 늙은이'의 입장에서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은, 진정성을 담기엔 요즘 세태가 너무 바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죠.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성찰할 여유도 없고요. 참다운 의미에서 '멋지게' 조탁할 시간이 없습니다. SNS에 올라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 중심의 글쓰기 행태를 보면 자기 '분신'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자신', '인격', '주체성'이겠지요.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 분신을 자꾸 조급하게 꾸미고, 가짜로,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구토>에서 말하는 '개자식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진정하지 못한 삶임은 분명하죠.
사르트르는 한 인간을 그 사람이 한 행동의 총합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하는 행동에 온전히 자신의 인격과 주체성을 실어야겠지요. 한 마디로 살아 있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뜨겁게, 치열하게, 많은 것을 해보고, 많은 것을 남기고 죽으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사르트르의 사유에서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지만 그 욕망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실패의 역사요, 인간은 무용한 정열 그 자체이지요. 사르트르는 그 걸 알지만 그럼에도 더 열심히 살자, 뭔가를 만들어내고 남기자고 합니다. 그것도 최대한 자신을 투사해서요. 비극적인 삶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야 이 지구상에 왔다가 간 흔적이라도 남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먼지'로 되돌아갈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