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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공방 내부에 진열된 향료들 .
향수 공방 내부에 진열된 향료들. ⓒ 김지섭

"고등학교 때 배우는 화학에 재미를 느꼈던 게 시작일 거예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을 보고 나서 향수에 관심이 생겼죠. 우리나라엔 우리나라만의 향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제 꿈은 항상 조향사였어요. 프랑스가 향수로 유명하다고 해도, 향수의 모든 것이 프랑스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본을 대표하는 향수 겐조(KENZO)가 있듯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만의 향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5일, 홍대 골목의 한 공방에서 만난 그녀는 수업을 막 끝낸 뒤였다. 조그마한 갈색 병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는 선반과 따뜻한 조명. 향을 만드는 일이 화학자나 실험실을 떠올리게 하지만 공방의 분위기는 아늑한 작업실에 가깝다. 조향 체험을 위해 일반인들을 둘러앉힌 다음 한 방울씩 향료를 섞다 보면, 공방 앞을 지나치는 행인들이 흥미롭게 바라본다고 한다.

이 향수 공방의 설립자 중 한 명인 문인성 대표는 직접 조향 수업을 진행하는 베테랑 조향사다. 그녀는 향수를 만드는 사람이자 향수 만들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공방의 시그니처 향수를 내놓는 한편, 조향 클래스를 통해 사람들과 만난다.

이곳의 조향 수업에는 2시간 동안 조향 체험을 하는 '원데이 클래스'에서부터 50주에 걸친 전문 클래스까지 있다. 원데이 클래스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조향사들이 준비해놓은 향료를 섞으며 자신만의 향을 만들어낸다. 전문 클래스의 수강생들은 향료 자체를 만드는 모든 과정까지 이해해야 한다.

전문 클래스 수상생들은 그녀처럼 조향사가 되어 공방을 운영하려는 사람부터 음악가와 미디어 아티스트까지 다양하다. 학생들은 매주 자신이 만드는 향의 콘셉트에 맞는 사진 파일을 보낸다. 시나 에세이를 써서 보내는 사람도 있다.

향의 느낌은 사람마다 모두 달라 어떤 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향의 콘셉트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해내야 한다. 그녀는 학생들이 향의 밑그림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제한을 두지 않는 편이다. 그녀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학생이 만든 결과물이 표현 의도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조향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문인성 대표 겸 조향사 .
조향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문인성 대표 겸 조향사. ⓒ 본인 제공
 
- 조향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향을 만든다는 건, 간단하게 말해 여러 향료를 섞는 거예요. 그런데 향료를 섞어서 나올 수 있는 향은 무한에 가까워요. 비율에 따라 강하거나 약해지고, 어떤 향료를 더하거나 뺄 때 향은 부드러워지거나 날카로워져요. 향료 한 방울이 향의 색깔 자체를 바꿀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시각적으로 빨강에서 파랑은 멀리 떨어진 색깔인 것에 반해 향은 향료 한 방울에 따라 빨강에서 파랑으로 바뀔 수 있어요.

이렇게 보면 일종의 화학 실험 같지만, 향수와 조향의 특별한 점은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지나간 세월의 어느 순간을 기억해보려 최대한 그때와 똑같은 느낌의 향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날의 분위기, 그날의 미소까지도 떠올리게 하는 냄새가 있는 거죠.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해 향수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어요. 공방을 찾는 연인들이 그런 경우죠. 연인들 대부분 오늘이 행복해서, 서로의 사랑을 보존하는 의미로 조향 체험을 해요."

- 나만의 향기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만들어진 향수나 디퓨저를 사는 것과 조향의 차이는 자기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점이에요. 이 세상엔 뛰어난 향수가 참 많지만, 아무리 향수가 다양하더라도 모든 개개인의 느낌을 표현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느낌을 향수에 맞추는 셈이죠.

조향을 하다 보면 자신이 싫어하는 향과 좋아하는 향의 구분이 생겨요. 내 안의 다채로움과 나 자신의 고유함을 발견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조향은 말 그대로 창작이에요. 타인에게 좋은 향이 아닌 자신에게 좋은 향이면 돼요. 그렇게 얻어진 결과물을 통해 자신에게 조금 더 온화해질 수 있다면, 그건 조향이라는 행위의 가장 좋은 결과일 거고요."

- 고유한 개인의 향기는 이 공방의 슬로건, "절대적인 향기를 탐구한다"는 것과 어긋난 게 아닐까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 묘사되는 그런 '완전한' 향을 찾는 것도 맞아요. 영화의 그 지독한 결말과는 다른 완전함이어야겠죠. 아름다움과 평온함으로 이어지는 그런 완전함.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절대적인 향기를 탐구한다'라는 문장에서 '절대적인 향기'와 같은 무게와 깊이를 '탐구한다'에도 부여하고 있어요.

절대적인 향기라는 것은 탐구하는 그 과정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향을 만드는 행위 자체에서도 나오는 것일 수도 있어요. 멈추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 절대적인 향기의 가장 가까운 느낌일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새로운 향수 제품을 내놓으려는 것이고, 계속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요.

향 자체가 원래 그런 면이 있어요. 향은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 떠도는 기억이자 느낌이에요. 퍼졌다가 모이고, 도약하고, 수그리고, 단단하고, 부드럽고, 경쾌하고, 아늑하고."

-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조향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조향을 통해 '과거'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현재'의 행복을 남겨요. 제게 남들과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면, 바로 '미래'예요. 조향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곳에서 나의 작업으로 미래를 그려볼 수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향수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 오겠죠. 그런 나날들이 있는가 하면, 저 개인적으로 좀 더 나은 향수를 만드는 나날도 있을 거고요.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라는 점에서 향기는 저의 가장 친근한 언어이기도 해요. 향수를 내놓거나 조향하거나 가르치거나. '언제나 우리의 언어는 향기'라는 공방의 문장도 이런 생각에서 나온 거예요."
  
홍대 공방 내부에서 .
홍대 공방 내부에서. ⓒ 김지섭
 
- 당신의 수업을 들었던 사람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
"싱가포르 여행자가 향수를 만들었던 적이 있어요. 향수를 만들다 말고 그 사람이 저를 바라보더니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라고 말했어요. 행복해진 건 그 사람인데, 그 한 마디는 도리어 나를 행복하게 했어요. 마치 내가 찾던 한 방울의 정확한 항료가 뒤섞이는 것처럼 나를 위로했어요. 당시엔 여러 힘든 일이 겹쳐 있었거든요. 하루치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감사하지만, 그 사람처럼 인생 전반에 걸쳐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사람에겐 애틋함마저 생겨요.

얼마 전에 예전 일기장을 봤어요. 조향사로 활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기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저의 생활은 아주 혹독했어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도저히 여유로울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일기장에는 정말이지 행복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있었어요. 꿈을 이뤘다는 행복으로 가득했어요."

- 조향사가 아닌 인생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지금까지의 제 인생을 생각해보면, 제 인생은 향수 때문에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니에요."

향기와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방엔 정작 도드라지는 향기가 없다. 조향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강렬한 향기를 배제한다고 했다. 후각을 이완시켜주는 커피 원두 냄새가 조금 묻어나는 것도 같았다. 향료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조금만 열어도 공간은 새로운 옷을 입는 것처럼 바뀐다. 내가 던진 마지막 질문에 답하려 골몰하는 조향사의 모습은 뚜껑이 닫힌 유리병처럼, 자신이 담고 있는 향기를 내보내려 준비하는 것 같았다.

- 이미 꿈을 이룬 당신에게 아직도 꿈이 있나요?
"저에게도 공방에게도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조향사 문인성입니다', 이게 저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조향사가 되었지만 어떤 조향사로 남을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하나의 향은 다가오는 향과 머무르는 향 그리고 마지막 잔향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조향사가 되는 것이 저의 처음 향이었다면, 앞으로는 어떤 향으로 변할지 알 수 없어요. 저는 나이가 들어도 새롭게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만들지 못한 향수,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까지 그것들로 저는 좀 더 풍부해질 거예요."
 
눈 오는 날, 홍대 공방 .
눈 오는 날, 홍대 공방. ⓒ 김지섭
   
그녀와 인터뷰를 했던 그날 저녁, 서울엔 눈이 쏟아졌다. 폭설이었다. 눈이 조금 덜 내렸더라면, 눈발이 더 부드러웠다면 쌓인 눈 위에 찍힌 사람들의 발자국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집을 나서는 쪽이 더 많았을까.

눈 덮인 길 위로 남겨진 사람들의 발걸음엔 기습 같은 폭설에 대한 당황도 담겨 있었지만, 포악한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코로나19가 없었고, 눈발이 부드러웠다면 거리엔 눈사람도 더 많았을 것이다. 이날 인터뷰에서 나는 코로나19가 조향과 향기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물었는데, 대답을 골몰하던 문인성 조향사는 며칠이 지나 답변해 주었다.

"타인과 마음껏 마주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던 때에는 타인을 향하는 향기가 많았어요.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기에 치중된 향, 이를테면 매혹적이고 쟁취적인 향이었죠. 그런데 이제 타인을 향하는 향기보다 타인과 어우러지는 향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줄었지만 나의 공간과 나의 사람에게 더 가까워지는 시기예요. 어우러지는 타인은 아마도 가족, 연인, 동료, 친구처럼 이미 경계를 무너뜨린 사이일 거예요. 충분히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퍼지는 향은 더 부드럽고 더 편안할 수밖에 없어요. 서로를 배척하는 향이 아닌 어우러지는 향. 집안에서만 아니라 집 밖으로도 그런 향이 퍼져나갈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기자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됨.


#인터뷰#향수 공방#조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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