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무도 원망 말라' 는 유서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고,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가 스스로 "노무현의 시대가 오면 자신은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놨듯,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는 노무현이 남긴 철학적 유산과 함께 돌아가고 있다. 정치계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긍정적인 방향으든, 부정적인 방향으든 언급되고 계승되고 있다.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로 출발했던 노무현재단. 노무현재단 역시 시간이 흐르며 단순한 대통령 기념 재단을 넘어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는 인플루언서 (Influencer) 형태로 발전했다. 참여정부 출신 친노 인사들이 역대 이사장을 거쳤고, 2018년 10월부터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통령 재단 중 유일하게 후원만으로 운영되는 재단이라는 특이점도 가지고 있는 노무현 재단은 서울 신수동과 노 전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봉하마을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2020년 1월 21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노무현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4번 출구에서 3분 정도 걸어가면 노무현재단 안내판이 보인다. 건물 6층 사무실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을 위해 빌딩 입구에 큰 안내판에 세워져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6층에 들어서니 노무현재단 사무실 입구가 보인다. 재단 사무실 안에는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사무실과 방문객들이 들어갈 수 있는 회원 도서관 '한다'가 있다.
도서관 입구에는 회원들의 이름으로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있다. 2008년 대통령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방문객을 맞으며 보여줬던 '농부' 노무현의 정겨운 웃음이 인상적. 어쩌면 너무 빨리 끝나버린 그의 행복했던 시간,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파오는 듯했다.
복도에 걸려있는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을 지나니 눈에 띄는 물건이 화분 옆에 놓여 있었다. 봉하마을에 위치한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깔려있는 박석의 샘플 모형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서 소망했던 '작은 비석'은 시민들이 크고 아름답게 가꿨다. 그가 뭍혀있는 너럭바위 주변은 이 비석들로 전부 채워져있다. 시민들은 그 비석에서 그와의 약속, 세상과의 약속을 다짐했다.
문을 두드리니 재단의 직원이 나와 나를 맞아줬다. 재단의 직원은 도서관이 개방돼 있으니 이용해보라고 했다. 원래 코로나19 이전까지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열람할 수 있었으나 코로나 이후 도서관을 잠시 구경하는 것만 가능하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 독서를 즐겼다. 2004년 3월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2개월간 직무가 정지돼 있을 때는 청와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귀향해서도 그는 방문객을 맞거나 업무로 나갈 때 외에는 사저에서 독서를 하며 일상을 보냈다. 2016년 '대통령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대통령의 사저에는 그가 평소 읽었던 책들이 빼곡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종종 유시민 이사장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운명> <사람이 먼저다>,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이 집필한 <대통령의 글쓰기> 등도 눈에 띄었다. 노무현의 철학과 가치를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는 내용의 책들이었다. 책들 사이에서 보인 노 전 대통령의 영정과 흉상이 나를 멈짓하게 만들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노 전 대통령이 생전 간직했던 철학 중 하나였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1980년대부터 정치에 입문, 대통령에 당선되고 퇴임할 때까지 늘 본인만의 길을 걸었다.
그가 힘들게 갈고 닦은 길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이들도 많았으며 같이 길을 걷자고 하던 수 많은 동지들이 다른 길을 택하기도 했다. '왜 힘든 길을 택하느냐'는 안타까움에서 나온 '바보'라는 그의 별명도 이런 노무현의 인생을 상징한다.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느냐는 질문에 노무현은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한 문장으로 대응했다. 그의 길이 바다와 멀어보인다고 믿었던 이들이 있었지만 그는 좁고 돌 많은 강물을 지나 마침내 더 크고 먼 바다에 도달했다.
그중 책 한권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진보의 미래>다. 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자 독백이기도 하다. 생전 그는 진보세력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은 대통령이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대연정 제안 등은 그를 지지했던 진보 지지층의 이탈을 불렀고 그는 이런 현상에 대한 무척 고뇌했었다. 모두를 포옹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보여줘야 할 정치적 결정은 어떤 것인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답을 내기 위해 고민했다. 그가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고민한 흔적이 이 책에 모두 담겨있다.
아쉽게도 노 전 대통령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수많은 이들이 이 숙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이 질문은 숙제를 풀어준 답안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재단 사무실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관람객들을 위해 조성한 봉하마을과 달리 신수동에 있는 사무실은 철저한 업무를 위한 공간이었기에 방문객으로서 체험하고 관람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15분 정도의 짧은 방문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자처하고 나선다. 노무현이 남긴 미완의 숙제를 풀어줄 사람은 누구인지, 또 그가 꿈꾸던 '사람사는 세상'은 언제쯤 이뤄지는 것인지 가끔은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노무현 정신의 진정한 주인인 시민, 그 시민이 만들어내는 '시민의 힘'으로 미완의 질문처럼 느껴지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