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서울현충원 자리는 1954년 국군묘지 건립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진 63가구의 주거지가 있던 곳이다. 이중 독립운동가 최주영(본명 최태윤, 1896~1933)이 살던 집도 있었다. 삼판동(현 용산구 후암동) 출신의 최주영은 일제 강점기 이곳 서울현충원 자리에 있던 동작리에 살았고,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후 3년만에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곳도 이곳 동작리였다. 국립서울현충원을 자주 찾는 편인 기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가 최주영을 떠올리고 만다.
교사 출신 독립운동가 최주영의 1차 망명
최주영은 일찍이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수원공립보통학교(1917)와 평택공립보통학교(1918)를 거쳐 경성의 미동공립보통학교(1919, 현 미동초등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던 인물이다. 일제는 교원의 급격한 수요증가에 부응하기 위해 1913년부터 경성고보의 부설기관으로 임시교원양성소를 설치·운영했는데, 최주영은 1917년 또는 그 이전에 교원양성소를 졸업했을 것이다.
1933년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최주영은 1919년 3.1혁명에 참여한 직후 미동공립보통학교에 사표를 제출했고, 1922년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목적으로 중국 북경으로 망명했다.
1차 중국 망명 시절 최주영은 교사 출신답게 북경에 있는 동포 자녀를 교육시킬 목적으로 1922년 8월에 창립된 북경한교교육회(회장 이성영)에도 참여했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해 1923년 1월에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도 북경지역 대표자로 참여했다.
최주영은 활동 여건이 여의치 않게 되자 1924년 1월경 국내로 일시 귀국한다. 그가 귀국한 사정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표자들이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향을 잡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최주영이 귀국해 약 1년간 머무른 곳은 시흥군 북면 동작리의 최유선 집이었다. 최유선은 최주영의 아버지 또는 친척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유선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동작리 사람들 65명 중 한 명이자 1930년 당시 동작리 구장을 맡고 있던 최의선과 동일 인물 또는 친척 관계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최주영의 2차 망명과 다물단 활동
최주영은 1925년 1월 재차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번에는 북경을 거쳐 천진에 자리 잡는다. 최주영이 다물단(多勿團, 단장 황익수)에 가입해 활동한 것도 바로 이 2차 망명 시기다.
다물단은 신채호, 유자명 등 무정부주자들이 관여해 1925년 4월 베이징에서 결성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1931년 체포된 다물단원 이우민(1891~1943)이 일제의 신문 과정에서 밝힌 진술에 따르면 자신이 다물단에 가입한 시기를 1923년으로 특정해 다물단의 역사는 더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물단이라는 명칭은 용감·전진·쾌단을 의미하기도 하고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하는데,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최주영이 가입한 다물단은 친일파와 밀정을 처단하거나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인 의열투쟁 단체로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최주영은 1925년 의열단(단장 김원봉)과 다물단이 공동으로 벌인 일제의 고급 밀정 김달하 처단 투쟁에 참여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김달하는 대한제국의 외아문 주사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의 총무도 지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1913년 조선총독부의 밀정이 돼 북경에서 비밀리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기 중화민국의 총리를 지내기도 한 북양군벌의 거두 단기서의 비서로 있으면서 또 다른 고급 밀정 정운복(초대 서북학회 회장)과 연계해 10여 년간 암약하면서 대한의 많은 청년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김달하의 처단에는 의열단의 이종희와 이기환, 다물단의 최주영과 이규준이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달하가 처단된 소식은 국내 언론에도 신속히 보도됐다. 다물단은 1928년 4월에도 또 다른 고급 밀정 김천우를 처단했다.
2차 망명 시기 최주영은 다물단 활동 외에도 천진 한교단(韓僑團, 단장 유세관)의 총무로도 활동했다. 한교단은 '부인의 직업소개, 공동묘지의 경영, 유치원의 설립 등을 목적'으로 하고 유치원도 직접 경영하는 비정치적 조직의 외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유치원의 이름이 '삼일유치원'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천진 지역 교포들 사이에서 독립의식을 고취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단체였다. 최주영은 이 천진 한교단의 총무를 맡아 실제 일을 총괄하는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거액의 독립군자금 마련 추진 중 체포된 최주영
최주영이 천진 이탈리아 조계에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된 것은 1927년 12월의 일이었다. 당시 최주영은 이탈리아 경찰의 불심검문과 압수수색으로 동지 강익찬(당시 26세)·김관우(당시 23세)·김용선 등과 함께 체포됐다. 이탈리아 경찰은 최주영 일행을 일경에 넘겼고, 곧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최주영은 체포되기 전 영국 조계지에 있던 조선인 박도일이 한 외국인에게 거액을 상속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만주에서 온 강익찬·김관우·김용선 등과 함께 박도일로부터 상속액 중 15만 원 상당을 군자금으로 내놓으라고 할 참이었다. 최주영은 권총까지 준비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이 군자금 모금 사업을 진두지휘할 백옥산이 만주에서 오기를 기다리던 중 거동 수상자로 지목돼 불행하게도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은 '상해 가정부 거두 이동녕 체포 호송'이라는 오보로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이들의 소지품에 이동녕의 이름이 있었던 관계로 오해를 받은 탓이었다. 이후 오보가 정정되며 최주영 일행의 이름이 등장하는 후속기사가 나오지만, 이때도 최주영 일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녕의 부하로 소개됐다. 하지만 이 역시 오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은 1920년대 후반 수많은 국내진공 작전을 주도했던 만주의 독립군 대장 중 한 명인 한국혁명군 사령 이응서(1890~1933)가 1929년에 체포되면서 또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최주영 일행을 취조한 일경이 이들의 배후로 지목한 만주의 백옥산은 바로 이 한국혁명군 사령 이응서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최주영은 다시 일경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독립운동의 제단에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최주영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군자금 모금 계획이나 다물단 백옥산 등과의 관련 사실 일체를 부인하는 신문투쟁과 재판투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군자금 모금을 위한 실행 준비 단계에서 임검으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면서 사건이 시작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주영은 가지고 있던 권총도 군자금 모금용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단지 민무라는 인물이 잠시 맡기고 간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함께 체포된 강익찬·김관우 등을 자신의 집으로 파견한 배후 인물 백옥산에 대해서도 자신이 백옥산의 한국혁명군에 가입해서 알게 된 인물이 아니라, 1914년 여름 경성부내 청림교 중앙본부에서 처음 알게 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응서(백옥산)는 동학의 한 계파인 청림교 강계지부장 출신으로 의술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최주영은 1927년 북경에 있을 때 우연히 봉천에 있는 백옥산과 서신 왕래를 했고, 천진으로 이주한 후에도 다시 무순에 있는 백옥산으로부터 가까운 장래에 천진 방면으로 놀러온다는 서신을 받고 아편밀매 때문이 아닌가 하고 기다렸을 뿐이었다고 했다. 백옥산의 소개장을 들고 온 강익찬·김관우에 대해서도 단지 마약밀매를 위한 백옥산의 심부름꾼으로 여겼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주영의 이러한 신문투쟁과 법정투쟁은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일제는 백옥산과 최주영의 관계를 시인한 강익찬의 진술을 증거로 채택해 최주영에게 징역 2년형을 언도했다. 최주영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일제는 이마저 기각해 버렸다.
그래도 형량을 낮추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최주영이 당한 고문의 강도는 훨씬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최주영의 몸은 그만큼 더 망가졌다. 결국 최주영은 예심 기간까지 합쳐 2년 9개월간 옥살이를 한 후 1930년 9월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출소 이후 최주영은 동작리 자택과 죽첨정(현 충정로)에 있는 처남한인원(부인 한영순의 오빠)의 집을 오가며 병 치료와 요양을 거듭 했지만,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3년 8월 28일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어떤 언론은 "시흥군 동작리에서 정양 중 장서하였다"고 보도하기도 하고, 어떤 언론은 "시내 모 병원에서 별세하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최주영의 죽음을 보도한 한 언론은 "이태리 조계에서 7년 전에 체포되어 경성에서 3년 복역을 마치고 출감한 후 옥중의 득병으로 이래 신음 중이던 최태윤 씨는 지난 28일 오후 4시에 시내 모병원에서 별세하였다 한다"라고 최주영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씨의 나이는 38세의 원도있는 청년이었다"는 말로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진하게 드러냈다.
1919년의 3.1 혁명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 망명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최주영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지 3년 만에 불과 38세의 젊은 나이로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이렇게 바쳤던 것이다.
교사출신 독립운동가의 집터에 들어선 교사출신 일본군 장교의 묘
교사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최주영의 집이 언제 동작동에서 사라졌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직후 최주영의 집터도 국군묘지 부지에 편입되면서 1954년이 되면 이곳에 있던 집들이 다 철거되니, 최주영이 살던 집도 이때에는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1979년 11월에 전직 대통령묘역에 안장된 박정희가 독립운동가 최주영을 우리의 기억에 소환했다. 박정희와 최주영은 일제강점기 보통학교(소학교) 교사를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둘이 선택한 삶의 길은 전혀 달랐다.
최주영이 교사직을 박차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다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면 박정희는 문경심상소학교 교사(훈도)직을 박차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본군과 만주국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최주영의 선택과 박정희의 선택, 과연 어떤 선택이 더 가치 있는 선택이었을까. 뻔한(?) 답변이 예견되는 이러한 질문이 과연 질문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질문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주영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그 시기는 박정희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1979년으로부터 32년이나 지난 2011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주영이 살던 자리에 무려 3636㎡(1100평)에 달하는 박정희의 초호화 무덤을 만들었지만,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최주영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일진대 독립운동가 최주영의 집터에 들어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화려한 묘 앞에서 어찌 비통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