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인가. 현행 민법 779조는 가족을 '배우자, 직계혈족,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규정하고 있다. 고로 이 사회에서 가족이 되려면 피를 나누거나 결혼을 해야만 한다. 이제 와서 피를 도로 넣거나 뺄 수는 없으므로 타인과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혼신고를 해야만 한다. 자, 이쯤에서 당신이 속한, 또 속할 공동체가 과연 가족인지 아닌지 테스트를 해보자.
만약 당신이 베스트셀러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김하나, 황선우 작가처럼 산다면 어떨까? 동성 친구끼리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함께 돌보며 산다면? 안타깝게도 법적으로 당신과 친구는 가족이 아니다.
HBO에서 방영된 드라마 <더 월 2>(원제 If These Walls Could Talk)처럼 30년 넘게 함께 산 동성 커플이라면? 알콩달콩한 두 할머니의 모습은 추운 겨울 막 손에 쥔 호빵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만 어쩌겠나. 가족이 아닌 걸.
그럼 KBS1의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처럼 나이 먹고 여자들끼리 모여 산다면? 다 늙어서 남편 밥상 차려주느니 차라리 우리끼리 살자는 이야기에는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살아 온 중년 여성들의 유쾌한 내공이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법적으로 이들도 가족이 아니다. 조금 특별한 경우 같은가?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떨까. 쉰이 넘어 재혼했는데 낯부끄럽다며 결혼 신고를 하지 않고 산다면?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면?
우리 법에서 혼인은 법적인 혼인신고를 해야만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함께 사는 사람을 사랑하건, 오래 살았건, 배우자로 생각하건 관계없이 그건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다. 가족에 대한 상상력과 삶에 대한 상상력은 슬그머니 뒷주머니에 넣어두길.
법적으로 '평범한 가족'이란 '평범'이라는 단어가 늘 그렇듯 쉽게 얻기 힘든 단어니까.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감히 다른 삶을 상상하며 보호를 바라다니. 무엄하도다! 과연 살면서 사회가 제시하는 모범적인 삶의 모습에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까짓거 가족으로 인정받지 않으면 어때라고 쿨하게 넘길 수도 있다. 사실 나도 눈 질끈 감고 쿨하게 넘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가족이 되어야만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수술동의서에 도장을 찍을 수도,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한 사람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당신과 파트너가 함께 낳은 아이가 태어났다고 신고할 수도 있다. 세금을 함께 신고하고, 함께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청약을 넣고, 재산을 같이 모아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여성가족부가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안'을 통해 법적인 가족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나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동거인, 노인 커플, 친구 그룹까지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계획안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을까. 비말이 공포의 상징이 된 시대지만,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땀방울에 박수를 보내 본다. 물론 이번 계획안이 진짜 효과를 발휘하려면 민법과 건강가정기본법 등이 먼저 개정되어야 한다.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아직 공사도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말들이 많다. 가족 범위가 넓어지면 결국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자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들린다. 특히 이런 법이 제정되면 동성애자들도 가족이 되어 법의 보호를 받는 게 아니냐, 성소수자의 인권 보장의 전초 작업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뒷목을 잡고 기함을 하는 그들의 목을 살포시 받쳐 드리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도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답니다.'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흑인을 지지하지 않고 중국인을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 조건에서 태어난 것은 찬성하고 반대하고 할 이슈가 아니다. 누군가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입에 방귀를 넣어주겠다.
그렇다면 가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인가? 그렇다. 동성결혼'도' 합법화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가족 범위 확대의 다른 이유에 공감한다면 동성결혼은 우려하는 의견은 왜 나오는 걸까? 혹시 성소수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설마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이들이 성소수자의 인권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니, 나의 추측은 한심한 망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혹자는 인류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한 성인도 동성애를 금지했다고 말하지만, 그 자애로우신 성인의 입에서 혐오의 말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다고 하지 않던가!
다른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것이 기존의 '건강한 4인 가족'을 해친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형태의 가족이 기존 가족 형태를 해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족의 등장이 기존 가족에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옆집 사람들이 4인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 가정에 불화가 생긴다고 생각할 만큼 비합리적일 리는 없으므로 이런 가설은 역시 나의 망상이라고 치부해 본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서 말하는 '건강'이란 '표준'이나 '평균'을 말하는 걸까? '부부와 미혼자녀' 가구 비중이 20%대로 떨어지고 1인 가구 수가 30%를 넘어선 걸 생각해보면 더 이상 아들 하나 딸 하나 행복한 4인 가족이 수치로 '평균'이라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세금과 주택 등에서 혜택을 받기 위해 위장 가족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길 거라는 우려도 있다. 아파트 청약이나 정부 수당 등을 받을 때 가족으로 인정받으면 좀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위장 가족을 만드는 사례가 생길 거라는 우려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에 대한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런 고려는 정책을 세울 때 세심하게 다듬어야 할 근거가 되어야지, 정책을 세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우선일까? 유엔의 세계 인권 선언 제1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단어, 가족
누군가는 혼자 살아야 행복하고, 다른 누군가는 아이 없이 둘이 살아야 행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럿이 모여 살아야 만족스러울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부의 정책은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건강가족기본법의 새로운 이름을 응원하며 이것이 단순히 선언이 아닌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 때까지 지켜보려 한다.
영화 <고령화 가족>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가족이 뭐 대수냐. 같은 집에 살면서 같이 살고 밥 먹고, 슬플 땐 같이 울고, 기쁠 땐 같이 웃는 게, 그게 가족인 거지." 덧붙이는 글 | 글 노동자.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