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새벽에 득달같이 일어난 김영금(1919년생)은 보따리를 챙겼다. 큼직한 보따리를 두 개나 들었는데 하나는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옷이었다. 남편 이기동(당시 30세)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 지난 초봄 면회한 이후 처음이니, 4개월 만이었다. 김영금은 남편이 한여름에 봄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미안함이 앞섰다.
전남 완도군 신지면 월량리에서 새벽에 출발한 그녀는 신지면에서 채취선을 타고 두 시간이 걸려 강진군 마량에 도착했다. 그곳 강진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포장도로라 몸이 춤을 췄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광주에서 다시 전주 가는 버스를 탔다. 전주시 진북동에 위치한 전주형무소에 도착한 때는 오후 4시였다. 새벽 6시에 출발했으니 꼬박 하루가 걸린 것이다.
공동묘지 구덩이에서
형무소 인근에 숙소를 잡은 그녀는 다음날 일찌감치 면회 신청을 했다. "이기동 면회 왔어라." 한창 뜸을 들이던 간수는 "당신 남편은 여기에 없소"라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하먼 우디로 갔다요?" 영금의 질문에 간수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때였다. 머리가 빡빡 깎인 재소자들을 실은 GMC 트럭이 형무소 정문을 지나쳤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든 그녀는 트럭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다행히 트럭은 오래지 않아 전주시 공동묘지 터에서 멈췄다.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헌병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GMC트럭 적재함의 네 귀퉁이에 총을 들고 경계를 서던 군인들은 MP(military police)라는 글자가 새겨진 철모를 쓰고 있었다. 트럭에서 네 줄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있던 재소자들이 내렸다. 그들은 정신줄을 놓은 지 오래였다. 두 명씩 철사로 손목이 묶인 사람들은 헌병의 인솔 하에 공동묘지 산비탈로 올라갔다.
미리 파여 있던 구덩이 앞에 선 재소자들에게 헌병의 총구가 향했다. "탕탕탕!" 방아쇠를 쥔 헌병들의 손가락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움직였다. 목이 꺾인 재소자들은 구덩이로 몸이 떨어졌다. 트럭 두 대에 가득했던 재소자들이 저세상으로 가는 데는 불과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김영금은 오금이 저려왔다. 한여름인데도 오한이 걸린 듯 아래윗니가 부딪치며 '딱딱' 소리가 났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했다. 저 속에 남편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녀가 공동묘지 학살터를 다시 찾았을 때는 구덩이 가득 피가 고여있고, 시신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헌병들은 재소자들을 총살한 후 휘발유를 뿌려 태우기까지 했다. 시신의 얼굴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죽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시신에 구더기가 달라붙어 살을 파먹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토가 나왔다. 김영금이 공동묘지 구덩이 앞에서 무릎이 꺾인 채 통곡을 한 때는 1950년 7월 5일경이었다.
20명씩 태운 트럭이 수시로 공동묘지에
1946년 12월 17일 전주형무소의 행정업무 담당인 서무계로 근무를 시작한 이순기 간수는 6.25 발발 직후 평생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하루는 헌병대가 와서 형무소장에게 "재소자들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계엄 상태라 형무소장은 헌병대 장교에게 고양이 앞의 쥐였습니다." 그렇게 전주형무소장은 재소자인명부를 헌병대에게 넘겨주었다.
그때부터 헌병대는 형무소 간수들을 수하 부리듯이 했다. 재소자 중 중형자들부터 트럭에 20명씩 태웠다. 트럭은 공동묘지로 갔다. "한 차에 20여 명씩 공동묘지 근처로 태우고 가 말뚝을 세우고 붙들어 맺지요. 가슴엔 검정색 타게트(표적)를 붙이고 곧바로 총살했습니다." 상황을 직접 목격한 이순기 간수의 증언이다.(<말>지 2003년 5월호)
전주형무소 재소자를 태운 트럭은 공동묘지, 황방산과 인근 야산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했다. 1950년 7월 4일부터 시작된 학살은 7월 16일까지 이어졌다. 경제사범을 제외한 약 1500명이 골로 갔다. 총을 쏜 군인들은 7사단 3연대 소속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전주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6.25 당시 북한에서 발행된 신문에서도 확인된다. 1950년 9월 1일자 <민주조선>에는 종군기자 리동규의 글이 수록되었다. 다음 글은 <민주조선>에 실린 내용이다.
"전주시에 있던 반동 경찰과 헌병대와 소위 방첩대원 놈들은 인민군대의 맹진격에 겁을 집어먹고 6월 26일부터 애국적인 인사들에 대한 대량적인 소위 예비검속을 실시하는 한편, 6월 27일에는 전주 시내와 그 주변 농촌들에서 일반인민들을 총부리를 대고 강제로 몰아다가 전주형무소 뒤에 있는 공동묘지에 굴을 파게 한 다음, 놈들은 이날 밤늦게부터 6월 28일 새벽까지에 걸쳐 동 장소에서 형무소에 수감 된 3년 이상의 처형을 받은 애국 투사들을 미군 감시 입회하에 총살하였다.(신경득,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에서 재인용)
학살 일시와 피해 인원이 2005년 출범한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다르지만, 전주형무소 학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신지초등학교 교사, 어업조합 직원, 면사무소 직원
공동묘지와 황방산 등지에서 죽은 재소자 중에는 전남 완도군 신지면 사람들이 약 20명이 있었다. 김영금의 남편 이기동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해방 직후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에 살았던 이기동은 동경상고를 나와 신지면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는 좌우 대립이 심해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칩거했다. 그러다 신지초등학교 교장이 교사직을 제안, 신지초등학교에 근무했다. 그러다 학교에서 행해진 정치집회 관련 사건으로 그는 1948년 구속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영금은 남편을 빼내기 위해 시골에서 논 두 마지기를 팔아서 7만 원을 갖고 전주로 향했다. 이기동이 미결수 일 때였다. 그녀는 전주형무소 소장과 부장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남편이 곧 석방될 것으로 낙관한 영금은 시골로 내려와 모내기를 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영금은 부랴부랴 보따리를 싸 전주형무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가 전주형무소에 왔을 때는 이미 이기동이 공동묘지에서 저세상 사람이 된 후였다.(<말>지 2003년 5월호)
당시 전주형무소에는 완도군 신지면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정치종은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에 여수 수산학교를 다녔다. 정치종은 독서회에 참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 여수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자유인이 된 정치종은 1947년 완도수협 신지지소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는 신지면에서 개최된 집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1948년 12월 경찰에 연행되었다.완도경찰서로 연행될 때 그는 신지면 선착장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한두 달 후면 나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소." 하지만 그것이 정치종이 아내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이기동과 정치종처럼 완도군 신지면 사람들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이유는 대부분 1947년 3.1절 기념 집회와 메이데이 집회와 관련해서였다. 그들은 신지초등학교 교사와 어업조합 직원, 신지면사무소 직원이었다. 이 사실은 정이임(여. 신지면 동고리), 김정길(여. 신지면 동고리)가 만기 출소해 전주형무소 상황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다름의 인정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가을, 조선 민중들은 신생 국가를 건설하는 데 다양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민당, 한독당, 신민당, 조선공산당, 인민당 등 다양한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46, 1947년 3.1절 기념집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별도로 열렸다. 1948년 시행된 남한만의 단독선거에도 정치적 입장이 갈렸다. 그런데 한국전쟁 직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다름의 정치'가 용인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은 '빨갱이'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혔고 정부는 그들을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전국의 형무소에 가두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불법적으로 학살했다.
다름을 인정하고, 민주적인 토론과 합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는 남과북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한국전쟁을 일으키게 된 요인이 되었고, 집단적인 민간인학살의 토대가 되었다. 이 와중에 완도군 신지면 주민들이 전주형무소를 비롯한 육지에서 골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