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면서 올해 신축년 설날은 차례를 지내는 가정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설날 전에 미리 성묘를 다녀오는가 하면 시골에 계신 부모님도 형제들끼리 번갈아 가며 날을 달리해 뵙고 오는 명절 신풍속도 생겼습니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가정에 비해 대가족은 아니지만 설 연휴에 한 자리에 모이면 방역수칙 위반이 되기에, 명절 이래 처음으로 시간차를 두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 뵙고 왔습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조상님께 차례도 올렸습니다.
여느 명절과는 확연히 달라진 명절 분위기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씁쓸했습니다. 고향친구들조차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리기에는 너무 아쉬웠습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고향마을에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마을의 어귀에 정자가 세워졌다는 귀띔도 해줬습니다. 그래서 2007년 떠나면서 지금은 터만 남은 고향마을을 둘러보며 설 명절의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습니다.
반곡리 유적비, 실향민 아픔 달랜다
제 고향마을은 현재 단독주택 부지로 남아 있는 세종시 반곡동입니다. 그 옛날의 지명으로는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입니다. 마을 뒤편에는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괴화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마을 밖을 감싸며 휘돌아 흐르는 삼성천과 삼성천의 끝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금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의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런 고향마을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도 모자랄 만큼 지난 10여 년간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고향마을의 행정구역도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에서 2012년 7월 1일부터는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으로 바뀌었으니,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름도 바뀌고 도시로 탈바꿈을 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특별자치시로 빠르게 바뀌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나 연구단지가 들어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다른 마을들과 달리, 크게 안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고향마을 반곡리에는 어린이집을 비롯해 단독주택 몇 채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아직까지는 괴화산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마을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옛날의 추억들을 회상해 볼 수 있습니다.
수백년에 거쳐 조상대대로 삶의 터전이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한데 어우러져 오순도순 살던 인심 좋은 반곡리는,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지난 2007년 170여 가구에 이르던 마을주민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 2006년 펴낸 <반곡리 민속지>에 따르면, 2005년 5월 30일 기준으로 반곡리에는 176세대, 435명의 주민들이 거주할 만큼 금남면에서도 작지 않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 옛날 논이 있던 마을 입구에는 옛 지명을 그대로 딴 정감 있는 이름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가가호호 마을을 이루던 산 아래 마을부지에는 유명한 어린이집을 비롯해 일부 단독주택이 듬성듬성 있고, 작은 공원도 조성돼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개발의 손길에서 살아남아 마을 터는 잘 닦아진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옛날 고향마을을 떠 올린 뒤 현재의 마을터를 둘러봅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해 아이들의 군것질과 어른들에게는 막걸리를 팔던 연쇄점과 교회를 중심으로 고향마을의 실루엣이 그려집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깔깔거리며 숨바꼭질을 하고, 공을 갖고 노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모습부터, 설 명절이 되면 바닥에 멍석을 깔아놓고 윷놀이를 즐기던 마을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까지, 이제는 모든 게 추억이 돼 버린 그 시절의 그리운 모습들이 아직도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고향마을의 이곳저곳을 걸어서 돌다보니 작은 공원 안의 눈에 띄는 조형물 하나가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이름은 '반곡리 유적비'입니다.
유적비의 문구를 함께 고민하며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 유적비가 세워진 곳은 마을의 '한가운데'였다고 합니다.
마을의 한 가운데인 이곳은 필자와도 연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필자 친구의 집터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이 유적비로 인해 평생 집터를 찾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유적비가 친구네 집터에 세워진 이유로, 필자의 집터 또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게 됐습니다. 멀지 않은 이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곡리역사문화보존회 위원으로 '반곡리 유적비' 건립에 힘을 보탰던 필자의 아버지는 "반곡리 유적비는 마을의 중심이었던 곳에 세워졌고, 정확히는 네 친구인 영주네 집터"라면서 "반곡리 유적비 문구는 추진위원들이 여러 차례 모여 고심에 고심을 한 끝에 완성된 결실이라고 보면 된다"고 소회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반곡리 유적비' 건립이 추진위원들의 고민과 고심의 결실이었음을 함축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건립 과정에서의 고심을 유념하며 반곡리 유적비를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그 전에 먼저 세종특별시가 출범하기 이전의 행정기관이었던 연기군이 펴낸 연기군지에서는 반곡리 지명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남면의 전월산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지형이 소반과 같음로 '반곡(盤谷)'이라 불러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반곡리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반봉포란형(班鳳抱卵形)'의 명당이 있다.
유심히 유적비에 적힌 문구를 한 줄 한 줄을 마음속에 담은 뒤, 유적비 앞 바닥을 봤습니다. 고지도로 보이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반곡리 마을의 반가운 옛 지명이 적혀 있는 마을의 지도였습니다.
지도에는 지금은 '반'으로 불리지만 고향마을에서 쉽게 구분하기 위해 구역을 나눠 불렀던 '가운뎃말뜸', '웃말뜸', '아랫말뜸', '뒷메뜸', '안산뜸'이라는 정감 있는 명칭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정겨운 이름들을 되뇌어보니 가운뎃말뜸에는 누가 살았고, 뒷메뜸에는 누가 살았었고, 안산뜸에는 또 누가 살았었는지 그 이름들이 떠오르며 또 다시 추억 속에 빠져듭니다.
반곡리 주민들의 커뮤니티인 '반곡리역사문화보존회 사랑방'에도 반곡리 유적비에 대한 가슴 벅찬 소회를 표현한 글이 눈에 띕니다.
반곡리 출신으로 세종경찰서의 초대 서장을 역임한 김정환 전 서장은 '드디어 반곡리 유적비 건립!'이라는 북받치는 외침을 시작으로 소회를 전했습니다.
"4백여 년간 면면이 이어져 오던 고향 반곡리가 신도시 건설과 함께 잠시 사라졌었지요? 그런 꿈에도 잊지 못하는 우리의 고향을 끔직이 사랑하고 추억하는 분들이 모여 '반곡리 역사문화 보존회'를 만들고 이들의 지난하고 힘든 노력으로 반곡리 유적비와 함께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반곡리 출신 경주김씨 종친회장인 김동윤씨도 "드디어 반곡리 원주민의 소원이 이루어졌군요. 반곡동 시민에게 훌륭한 기념이 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반곡리가 집성촌인 여양진씨 집안의 진종호씨 역시 "추억 속에 잊혀져가는 고향 반곡리를 되살려 내시느라고 노고가 많으신 분들과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세종시와 전월산이 한눈에... '반곡정'에 오르다
필자 또한 고향마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는 가슴 벅찬 소회를 뒤로 하고 이번에는 마을 어귀에 지어졌다는 '반곡정(盤谷亭)'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낮 온도 15도를 가리키는 온화한 날씨에 세종시 국책연구단지 인근에 전망대처럼 우뚝 솟은 반곡정을 오르내리는 발길도 가끔 눈에 띕니다.
반곡정에 오르니 금강 건너편의 정부청사가 위치한 세종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뚝 솟아 있는 전월산과 유유히 흐르고 있는 금강변을 따라 삼삼오오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도 가끔 눈에 들어옵니다.
예전 명절 같았으면 금강변 주차장에 차량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고, 강변 공원에서는 왁자지껄 아이들의 뛰어노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겠지요. 텅빈 주차장과 띄엄띄엄 가끔 보이는 산책하는 주민들의 모습 또한 코로나19가 바꿔 놓은 한층 여유로워진 설 명절의 단상으로 보입니다.
반곡정 안을 둘러보니 눈에 띄는 글자판이 눈길을 끕니다. 반곡정이 세워진 2016년 3월 당시 이충재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의 이름으로 반곡정에 대한 기록을 새긴 '반곡정기(盤谷亭記)'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금강과 삼성천이 마을을 휘돌아 흐르고 괴화산 산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둥근 소반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옛 지명 반곡리를 기억하며 유구하게 흐르고 있는 금강과 함께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반곡정이라 이름한다.
반곡정에서 고향마을을 바라봅니다. 고층 아파트에 가로막혀 마을은 보이지 않지만 반곡정에 올라 시선을 주위로 옮기다보니 또 다른 추억이 오버랩됩니다. 반곡리 유적비에 이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반곡정이 있다는 것이 반곡리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반곡리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행운일지 생각하니, 유적비와 반곡정을 세우는 데 애를 썼을 고향마을 주민들이 고마워집니다.
마지막으로 '반곡리 원주민 일동' 이름으로 새겨진 반곡리 유적비의 비문를 그대로 옮겨 적으며 마칩니다.
"여기는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의 옛터이다. 백제시대에 소비포현, 신라시대에 웅주, 고려시대에 공주목, 조선시대에 공주목 명탄면 반곡리,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2012년 7월 1일에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여 반곡동으로 개편되었다. 반곡(盤谷) 지명은 마을 뒤에 계룡산 줄기 괴화산이 품고 앞에 흐르는 금강과 삼성천이 들판을 감싸 안은 지형이 둥근 소반 모양 같아서 붙였다고 전해진다. 잿께뜸, 뒷메뜸, 아랫말뜸, 가운뎃말뜸, 웃말뜸, 골말뜸, 안산뜸 7개 뜸이 있었다. 여수배, 뒷재, 와우령, 고개와, 앵챙이, 골뱅이, 나루와, 수루배, 여수배, 번제, 장성배기, 오전마루, 큰개, 들판에 우리 삶의 희비애환이 서리어 있었다.
반곡리는 주로 여양 진(陳)씨, 경주 김씨, 의성 김씨 세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소수의 밀양 박씨, 한산 이씨, 창녕 성씨와 더불어 대대손손 살았던 터전으로 우리들의 요람이다. 여양 진씨는 고려 예종 때 신호위 대장군 겸 상장군 진총후가 시조이고, 상계파조 4세 매호공 진화, 중계파조 6세 전서공 진번, 하계파조 13세 집의공 진우의 차자 14세 사헌부 감찰공 진한번이 조선 중종 30년(1535)에 복거하여, 100여 세대가 세칭 반곡 진씨의 세거지지를 이루었다. 경주 김씨는 신라 탈해왕 때 대보공 김알지가 시조이며,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고, 고려 검교태사 태자태사 김인관의 15세이며, 전서공 김자정의 7세인 병조 정랑 김론이 조선 선조 18년(1585)에 복거하였다. 의성 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의성군 김석이 시조이고, 9세 태자첨사 의성군 김용비가 중시조이며, 18세 절충 장군 김계윤의 손자 20세 김덕명이 조선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 중 복거하였다.
500여 년 역사의 반곡리는 1965년에 173세대 1130명으로 금남면에서 버금가는 농촌이었다. 장유유서와 예의범절이 엄격하고, 서당과 야학당을 열어 주경야독하는 향학열이 높았다. 연반계와 위친계를 조직 운영하여 애경사를 서로 도왔고, 품앗이로 농사를 지었으며, 치산치수로 가뭄과 풍수해를 예방하였다. 금강, 삼성천, 미호천이 합류하는 삼성 너머 농경지를 개간하고 뽕나무를 심어 양잠이 성하고 강변 밭에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누에고치, 토란, 땅콩, 수박 특산물로 소문나 풍요롭고 후덕하여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효자, 효부, 열녀, 항일열사, 장관, 차관, 각급 학교교장, 각급기관장, 육군장성, 판사, 변호사, 변리사, 법무사, 재계인사, 문인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주변에서 길지로 선망되었다. 2005년에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역사가 깊으며 향토민속이 잘 보존되고 있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06년에 현장을 심층 조사 발굴하여 '반곡리 민속지'를 발간하였고, 2016년에 '세종시 10년의 변화 반곡편'을 특별 발행하여 보전되고 있다.
역사의 진운으로 국력이 융성하여 행정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반곡리가 수용되어 수백 년 모셔오던 선조님들의 유골을 가슴에 품고 눈물을 머금으며 낯 설은 원근 타향으로 떠날 때 오순도순 정답게 살던 일가친척들이 흩어진 아쉬움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우리가 고향마을을 떠났으나 산천은 의구할 터이고, 반곡리가 국가 발전의 터전이 된 것을 자부한다. 실향민이 된 우리들은 망향의 일념으로 반곡동 여기에 입주한 시민들에게 괴화산과 금강의 정기를 받아 무궁한 번영을 누리기를 바라면서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지원으로 이 유적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