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행복'을 위해 달려왔다. 우리 모두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애면글면했을 것이다. 마흔이 돼서 그런 걸까. 요사이 부쩍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자신에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이 없다. '헛되고 헛되다'라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말처럼, 행복조차 헛된 건 아닐까.
일본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관뚜껑을 덮기 전까지 모른다." 결국, 죽어야 행복을 알 수 있나 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철학자도 행복에 대해 명쾌한 답 하나 내놓지 못하고 조용히 관뚜껑을 덮으셨다. 행복은 갓 마흔이 된 나에게 추상적인 거대 담론이다.
그간 내가 찾아 누렸던 행복을 정의하면, '은전 한 닢'이라 하겠다. 고(故) 피천득 선생 수필 속에서 늙은 거지는 벽돌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은전을 손바닥에 놓고 보고 또 본다. 그 은전은 거지가 여섯 달 동안 구걸하며 먹지도 않고 간신히 손에 쥔 것이다.
피천득은 거지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거지는 대답한다. "(단지) 이 은전 한 개 갖고 싶었습니다." 거지의 뺨에는 눈물이 흐른다.
가끔 아내는 무언가 가지기 위해 바동거리는 내가 처량해 보이나 보다.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그토록 애를 써서 가지고 싶어 해?" 아내에게 답한다. "가지면 행복할 것 같아." 한참 후, 원하던 것을 겨우 가진 나에게 아내는 묻는다. "행복해?" 선뜻 답하지 못한다. '은전 한 닢'을 손에 쥔 거지 모습이 나에게 보여서다.
그토록 원하던 바를 이루고 나면, 행복은 잠시다. 잠시나마 만족할 뿐, 또다시 불만이 나온다. 어릴 땐 자동차가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겨우 저축해서 소형 중고차를 장만했다. 새 차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돈을 모았다. 공장에서 갓 나온 중형차를 받은 날 기뻤다. 그러나 곧 외제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이런 나에게 정철 카피라이터는 이렇게 말해줬다. "올림픽 은메달. 지구 위 70억 인구 중 무려 2등. 그런데 금메달 놓쳤다고 꾸중하는 기사를 봤어. 욕심은 한이 없지. 지금 내가 손에 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비로소 행복에 가까워진다는 얘기. 행복의 반대말은 불만."
행복에 대한 정답은 아니지만, 세 가지 명확한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행복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행복은 창고에 쌓아둔 비상식량처럼 비축할 수 없다. 행복의 기준은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이다.
또 미래의 행복에 집착하면 염려가 생긴다. 내일이 불안한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 보질 못했다. 그러나 우린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는 데 익숙하다. 대입을 위해 학창 시절 재미를 미룬다. 취업을 위해 대학 생활 낭만을 유보한다. 요즘은 노후를 위해 젊은 시절 즐거움도 보류한다.
미국에서 운동을 배운 적이 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즐겨라(Enjoy)"다. 코치는 제대로 된 자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신기한 건 즐기니까 실력이 늘었다. 실력이 느니 또 즐거웠다. 지금을 즐길 줄 아는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살짝 엿봤다.
둘째,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어쩌다 떨어지는 벼락같은 짜릿한 행복보다는, 잔잔하게 뛰는 심장 박동 같은 행복이 훨씬 낫다. 게다가 행복감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완벽하게 적용된다. 행복감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는 증폭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소한다.
백영옥 작가는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행복이 '크기'가 아닌 '빈도'라는 명제를 끌어낼 수 있다. 큰 행복을 기다리느라 자잘한 행복을 놓쳐선 결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 '자잘한 행복'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에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언급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옷을 볼 때, 햇살 가득한 날 편하게 앉아 커피를 마실 때 느끼는 작은 즐거움이 바로 소확행이다. 요즘 나는 자잘하게 글을 쓰면서 '소확행'을 느낀다.
행복은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이뤄야 하는 목표가 아니다. 행복은 하나의 도구다. 일상을 윤택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자. 소소한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 길에 있는 꽃을 보자. 친구들과 노닥거리자. 잠이 쏟아지면 자자.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자.
마지막으로 행복은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물론 돈, 직업, 명예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이 마른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관계를 맺는다. 살아가면서 친구, 동료, 배우자, 자녀 등 수많은 사람과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산다.
사람들과 어울림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오스카 와일드 작가가 여기에 답을 줬다. "어떤 이들은 가는 곳마다 행복이 되고, 어떤 이들은 떠날 때마다 행복이 된다" 이왕 짧은 인생을 사는 거, 후자보다는 전자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워런 버핏은 54조 원 이상 기부했다. 신형 아반떼(기본 가격 1570만 원 기준)를 340만대나 기증한 셈이다. 그는 기부하는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부자만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는 어렵게 살지만, 익명으로 기부했다. 기부의 이유는 워런 버핏과 같다.
지난해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었다. 내가 마음이 아프니,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깜짝 놀랐다. 주변을 보면 겉은 멀쩡해도 마음 찢긴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들의 아픈 사연에 공감이 갔다.
그때부터 큰 금액이 아니지만, 마음을 담아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또 깜짝 놀랐다. 주변에 알리지 않고 기부를 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기부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재산의 절반을 기부한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애송한다던 랠프 월도 에머슨 시가 마음에 와닿는다. "당신이 살았음으로써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지금 갓 마흔 된 친구들. 그리고 소싯적에 '주일학교' 다녔던 경험이 있다면 이 노래를 알 테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초등학교 땐 멋모르고 불렀다. 지금에서야 알겠다. '은전 한 닢'으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 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