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교목도 바꾸고, 친일 시인 동판도 치우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 모든 것이 처음이었죠"
독립운동가의 흉상 건립 모금 운동을 마무리한 이후 마지막 행사를 준비 중인 부산 북구의 다행복학교(혁신학교)인 구포초등학교 김민선 학부모회 회장이 25일 활짝 웃었다. 11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구포초는 최근 2년 사이 학교 구성원 모두가 어느 때 보다 바쁘고, 보람된 날을 보냈다.
"구포초가 가장 먼저 시작했어요. 그런데 가장 늦었어요"
지난 2019년 구포초는 외래종이자 일제강점기에 들여온 기존 교목인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를 소나무로 교체한 데 이어 친일 행적을 보인 시인의 시구가 적힌 동판도 없앴다. 일본에 붙어 '부왜' 활동을 한 시조 시인의 작사 교가 또한 변경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개교가 1907년이니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국권피탈 이전, 민족학교(당시 구포 사립 구명학교)가 세워졌어요. 저도 이사를 왔는데 오랜 학교의 역사를 보고 놀랐어요. 바로 옆 구포장터도 일제에 항거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한 학교에 일제강점기 시기 교목이라니."
구포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구포의 장날 자주독립을 외친 만세 시위를 말한다. 일제의 엄혹한 탄압에도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적 증거였다. 당시 구포지역의 상인·농민·노동자, 지역유지까지 등 천여 명 이상이 시위에 나섰고, 일제 경찰은 무차별 발포와 강제해산으로 맞섰다.
이러한 항일의 역사를 아는 구포초 학생들과 학부모, 교직원들은 아직도 학교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에 주목했다. 교사와 학부모들이 먼저 팀을 꾸려 그동안 몰랐던 일제의 흔적을 찾아내고 청산 의견을 모아갔다. 비슷한 시기 친일 교가와 교목, 교표 등을 바꾸기 시작한 다른 학교보다 빨랐지만, 결정은 가장 느렸다.
"학교 안의 일제 잔재 청산은 부산에선 사실 구포초가 가장 먼저 시작했어요. 대신 교목은 가장 늦게 바뀌었죠. 계속 조사해보니 일본의 흔적이 너무 많은 거예요. 집집마다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투표하고 그렇게 모두가 민주적으로 결정했어요. 선생님, 학부모, 아이들과 함께한 생생한 역사 교육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교목, 친일시 등은 물론 '차렷'과 '경례', '훈화', '파이팅' 등 학교생활 속 일제 문화의 흔적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없애는 것이 있다면 되살리는 것도 있었다. 구포초는 올해부터 '잊힌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1892~1921)을 기리기 위한 노력에 한창이다.
구포초 1회 졸업생인 윤현진 선생은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친 애국지사다. 집안의 모든 재산과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에 쏟아부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한 이후 대동청년단, 백산상회 등을 거치며 비밀결사, 경제적 자립, 교육운동에 앞장섰고, 재무차장 등 상해임시정부 활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김구 선생과도 의용단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과로와 중병에 1921년 9월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채 타국에서 숨졌다. 그때 나이가 만 29세, 일본의 한 신문이 "그의 죽음은 곧 임정의 패망"이라고 논평할 정도였다.
김민선 회장은 "구포지역의 파평 윤씨 집안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독립에 바쳤다"며 "윤현진 선생님은 임시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사재를 털어 30만 원을 헌납했다(현재 가치로 보면 수백억 원)"고 설명했다.
구포초는 윤현진 선생의 집안에서 설립한 학교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지원한 민족 자본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도 한때 교장이었다. 윤현진 선생은 이제 없지만, 그가 배우며 독립의 의지를 다졌던 학교는 지금도 남았다.
"반일 인사의 가족은 일제의 온갖 박해를 받았고, 독립운동에 모든 자금을 사용한 터라 후손 분들도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지냈어요. 현재에도 후손 한 분이 거창에서 홀로 어렵게 살고 계십니다. 우리가 흉상을 세워야겠다 결심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했어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윤현진 선생님을 반드시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현재의 우린 그분에게 많은 빚을 진 것과 마찬가지예요."
제2의 윤서인, 램지어 안 돼... 역사를 잊지않고 기억해야
구포초 구성원들은 학교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는 점을 미안해하며 흉상 건립운동에 들어갔다. 부산 평화의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작가도 재능기부를 약속했다. 운송·설치, 재료비만 받기로 하면서 모금이 시작됐으나, 바로 코로나19가 들이닥쳤다. 김민선 회장은 "바자회도 열고, 마을잔치도 하고, 기부도 받고 계획이 정말 많았다. 결국 다 취소됐다"며 당시 난감한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 나온 아이디어가 독립운동가 굿즈와 펀딩이었다. '독립운동가 윤현진'을 알리는 우산과 물통을 만들고, 배지·스티커 등을 제작하자는 제안에 의견이 모였다. 아이들은 그림으로 힘을 보탰고, 학부모들은 윤현진선생흉상건립추진위원회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활동에 나섰다. 학교 구성원은 물론 인근 주민들의 호응에 다른 학교에서도 관심이 이어졌다.
사회적거리두기 단계가 더 강화되자 다음카카오 '같이가치' 기부펀딩의 도움도 받았다. 독립운동가를 위한 노력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800여 명이 넘는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소액 기부에 참여했다.
시안을 만들고 흉상을 제작하는 과정도 학생들에겐 보람이었다.
"아이들의 의견을 다 모아서 흉상 시안에 반영했어요. 작가님도 의도를 알고 흔쾌히 응하셨죠. 윤현진 선생님 캐리커쳐 그리기에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나섰어요. 그걸 스티커로도 만들었고, 흉상 기단부에도 새겼어요. 윤현진 선생님의 흉상은 되게 낮아요. 아이들이 마주 볼 수 있죠. 키 높이를 맞췄습니다. 비문도 아이들과 함께 적었고요."
그러면서 김민선 회장은 거듭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제2의 윤서인, 마크 램지어 교수 같은 사람이 더는 나와선 안 된다고 말한다.
"역사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역사왜곡이 판을 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하지 않으면 잊힙니다. 우리도 윤현진 선생님을 잊을 뻔했어요. 더욱더 찾아내고 기억해야 해요."
102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오마이뉴스>와 스팟인터뷰에 응한 김민선 회장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아이들이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친일파 후손이 더 잘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고, 지역에 몰랐던 애국지사가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역사를 기억하는 건강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해요. 2021년은 윤현진 선생님 순국 100주기인데 오는 3월 27일 구포장터 만세운동 소리가 울려 퍼질 때 후손 분을 모시고 제막식을 엽니다. 혹시 윤서인 씨도 오셔서 느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