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지역공동체는 2000년 3월에 설립된 대구시에 있는 장애인권단체로, 산하의 부설 기관으로 장애인야학, 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발달장애인낮생활지원센터를 두고 있다. 코로나 유행 초기에 대규모 확산이 발생했던 대구에서, 장애인지역공동체는 어떻게 감염병 상황을 타개했을까? 올해 초 조민제 사무국장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2월 1차 대유행 당시 대구 장애인지역공동체의 활동가들은 자가격리된 장애인 당사자를 직접 현장에서 지원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민제 사무국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단 뭘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또 정말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2월 23일에 13명의 장애인이 자가격리 되었을 당시, 24시간 동안 활동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 재원은 어디서 끌어올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복지부나 대구시가 정리해놓은 게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활동지원사들에게 부탁할 수 없었지요. 당시 코로나에 대해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활동지원사들도 자가격리자 지원을 기피했고요. 그래서 1대1, 2대1 이런 식으로 묶어서 활동가들이 동행격리 하자고 결정이 됐고요. 그런데 원룸에 사시는 분들은 동행격리를 하게 되면 지원자와 피지원자 간 2미터 거리 확보가 안 되는 등 여러 문제들이 있다고 판단해서, 장애인 당사자들 중 동행지원을 받기 어렵겠다고 말씀하셨던 분들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활동가들이 순회하면서 시에서 준 방호복을 입고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간헐적인 지원을 해드리면서 이겨냈어요.
또 2월 28일에 발달장애인 한 분이 확진되는 일이 생겼지요. 탈시설 하신 발달장애인분이라 혼자 생활하시거나 정보를 이해하시는 데에 어려움이 있으셨어요. 2월 28일 밤 10시 반에 보건소로부터 확진 문자가 왔는데, 병상이 마련될 때까지 그냥 집에 혼자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이 전부였거든요. 대구에 확진자가 매일 700명 정도 나오던 시기였으니까 병상이 포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방역 매뉴얼에는 장애인이 우선 입원대상이라는 내용이 아예 없어요. 그냥 중증 환자부터 먼저 입원시킨다는 내용만 있거든요. 이분에게는 시급한 입원치료가 필요한데, 우선적인 입원이 불가능하다보니 집에 계셔야 했고, 그래서 활동가가 방호복 입고 지원을 해드리는 걸로 정리가 됐지요. 물론 모두 보건소, 시청과 협의 하에 이루어진 과정이고요.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했던 거예요. "
- 대구에서의 코로나 대유행 당시, 이를 '지역 사안'으로만 보며 사안의 심각성에 공감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들었다.
" 그냥 정책적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거죠. 미루고 자시고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고려가 안 되었던 상황이었어요. 제일 갑갑했던 게, 방역대책본부가 만들어졌는데, 교통문제면 교통과 소관. 복지면 복지과 소관, 의료 문제는 보건과 소관, 이렇게 돼야 하는데, 장애인 관련 문제다 싶으면 다 장애인복지과로 몰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보건과와 장애인복지과 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데, 보건과는 장애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다 장애인복지과에 미루고, 장애인복지과는 권한이 없으니까 뭘 하려고 해도 잘 안 되고. 이 상황이 반복되었던 게 큰 문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가 느낄 땐 복지부는 1차 대유행 때에는 대구에 별로 신경을 안 썼죠. 장애인 담당 부서조차도요. 다른 데는 심각하지 않았다 보니까, 대구 상황을 지역 사안이라고만 여겼던 경향이 있었어요. 민간단체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상황에 대한 체감이 다른 거예요. 여기는 전쟁터 같은데, 대구 밖의 사람들은 뉴스에 나오는 단편적인 모습만 보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는 민관 가릴 거 없이 상당히 고립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 이 때문에 당시 대구 지역 단체들끼리 연대하며 해결책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소속된 장애인 단체들끼리는 네트워크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저희가 장애인분들이나 장애인 가족분들이 겪는 상황들을 최대한 커버했지요. 3월부터는 2월에 들어왔었던 엄청 많은 구호 물품들을 정리해서 2100가구 정도에 구호 물품을 보냈었어요. 그 정도가 민간에서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요. 사실 대구에 12만 장애인이 있는데, 이 모든 분들에 대해서 저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죠. 이 부분은 많이 답답해요. 여전히 장애를 가진 격리자, 확진자 통계도 없고요.
저희는 아예 전 부서를 포장팀, 방문팀, 이런 식으로 재편해서 일을 찾아서 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민관협력이 좀 더 잘 되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관에서 못하는 일을 민에서 거들어야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민간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규정을 안 해놓은 채 여기까지 왔다는 느낌이 굉장히 컸고. 그렇다 보니까 민간에서도 스스로 자기 역할 찾는 것을 어려워하는 단체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 대구시의 행정 미비 역시 활동가들이 마주해야 했던 문제 중 하나였다.
"1차 대유행 당시에는 신천지도 그렇고 대구라는 국한된 지역에 집중되는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었다 보니 특유의 어려움이 있긴 했죠. 그리고 대구가 광역시,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그런 엄청난 팬데믹을 감당할 수 있는 행정능력은 없었어요. 마비되었다는 느낌을 현실에서 많이 받았지요. 제 기억으로 첫 3주 정도는 보건소와 전화 통화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확진자나 자가격리자를 지원할 때에도 일단 1차적으로 보건소랑 통화가 되어야 하는데, 기본적인 소통도 불가능했던 거예요. 인력이 정말 없다는 게 느껴졌지요. 역학조사 관련해서도 비슷했어요. 역학조사팀 인력이 부족하니까, 저희가 일일이 미리 동선 다 확인해서 '이 정도는 자가격리 될 것 같다'고 표로 정리해서 주면 그제야 역학조사팀에서 속도가 나더라고요. "
- 코로나 대응이 장기화되며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활동가들도 많았다고 들었다.
"장애인활동가분들은 자신들이 쓸모없다는 감정을 많이 느꼈던 거 같아요. 장애인권운동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주장하고 투쟁하며 개선해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한데, 팬데믹 상황은 뭐를 할 수 없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장애인활동가 중 특히 리더급 활동가들이 굉장히 우울해 했었어요. 나중에 인권재단사람 같은 곳에서 심리상담을 지원해주시긴 했지만, 그걸로 다 채워지진 않았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의 민간단체들이 효율적으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당사자 활동가들의 민첩한 대응과 대구 소재 단체들 간 긴밀한 네트워킹 덕분이었다. 저희도 2월 18일 대구 첫 확진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되게 느슨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도 장애인 활동가들 중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감염취약계층 당사자이다 보니까, 코로나에 걸렸을 때의 공포나 무력감 등을 알기 때문에 SNS에 구호요청을 빨리 넣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당사자분들의 민감성 덕분에 대구가 조금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또 이건 지역의 특성일 수도 있는데, 서울 같은 지역은 단체들도 많고 협업도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대구는 지역에 몇 개 없는 단체들이 워낙 일상적인 활동들을 많이 함께 하거든요. 그런 특성이 당시에 시너지가 났던 거 같아요."
- 이처럼 활발했던 장애인지역공동체의 코로나 대응 활동 내역에 대하여, 조민제 사무국장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나누었다.
"대구 장차연에 전근배 정책국장이라고, 뛰어난 정책 역량을 가진 활동가가 있어요. 전근배 국장이 3월에 당시 상황에 맞게끔 입원 시 장애인 관련 고려사항을 매뉴얼로 신속하게 만들어서 복지부나 청와대에 넘기고, 정책요구안을 짜서 시나 중앙에 넘겨주는 활동을 했어요. 또 '발달장애인들이 읽기 쉬운 코로나' 같은 것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시도들을 했죠. 이런 제안들이 처음에는 씨알도 안 먹혔는데, 6월에 복지부가 매뉴얼 발표한 걸 보니까 저희가 작성했던 내용을 거의 다 비슷하게 넣었더라고요. 물론 출처에 저희 얘기는 안 적어서 조금 어이없긴 했지만요. 어쨌든 그 매뉴얼을 보고 전근배 국장이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정리해서 민간 차원 매뉴얼을 8월에 다시 내는 식의 작업들을 같이 많이 했어요. 코로나 관련 사례발표를 온라인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많아서 그런 발표를 통해서도 대응 방법을 많이 알렸지요. 당시에 서울장애인권영화제에서도 영상 작업을 해주시기도 했고요.
(유튜브에 공개된 "감염병의 무게" 다큐멘터리 참조)
잘했던 건 비상근무랑 당직체계를 만들어서 공백이 없게끔 초기에 대처한 것이에요. 야간에도 비상연락망을 다 갖추어서 장애인분들이 위급할 때 전화할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었고. 주말에도 계속 돌아가면서 당직을 섰거든요. 격리통보가 주말에도 오니까, 바로 대응할 수 있게 했었죠. 그리고 1차 대유행 이후에 장차연 안에 코로나19 특별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뒀었어요. 후원금 관리랑 자가격리자 혹은 확진자 발생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해 소통 채널을 하나로 만든 것도 잘했다 싶어요.
조금 비효율적이었다고 판단하는 건, 원래 저희 단체에 후원이 그렇게 많이 들어오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언론에 나가면서 후원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는데, 후원물품과 후원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노련함이 없었던 거죠. 잘 구조화해서 나누어 드렸더라면 2,100가구에 전달하는 데에 들어갔던 시간도 더 단축할 수 있었을 텐데 싶어요.
그리고 활동가들이 심리적인 부분에서 서로 못 챙겼던 것 같긴 해요. 저희 소식지에도 있지만, 중간에 자립주택에 계신 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활동가들이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코로나로도 가뜩이나 힘든데, 그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는 상황이 발생하니까.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저희의 경우에는 사람들을 말랑말랑하게 다독이는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덜한 조직이거든요. 일사불란하고 경직된 느낌이 강해서. 그런 데에서 아쉬움이 있죠."
대구의 활동가들은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감염병 대응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에 코로나 대확산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코로나 대응을 위해 달려온 조민제 사무국장은, 위와 같은 인터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며 이렇게 공유된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잘 축적되어 활용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위 인터뷰는 사단법인 두루의 '코로나 시대의 공익인권활동, 공익소송 및 연구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위 인터뷰가 담긴 연구 보고서(<코로나 시대의 장애인권 현황과 장애인권운동 아카이빙>)는 2021년 3월 말 발간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