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생애에 등장하는 인물군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부류가 기생(妓生) 또는 기녀(妓女)이다.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ㆍ춤 등으로 남성들의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다. 예기(藝妓)로도 불렸다. 그 원류를 살펴보면 신라 진흥왕 때에 여자 무당 직승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기원한다.
조선시대는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는 교방이 설치되어 가무ㆍ시ㆍ서화 등 기생이 갖추어야할 기본 기예를 가르쳤다. 노래와 춤과 몸을 파는 기생에 창기(娼妓) 또는 천기(賤妓)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시ㆍ서ㆍ화ㆍ가무에 능하여 예기로 불렸다.
"기생하면 1등에서 10등까지 있게 마련이지만, 1등 기생쯤 되면 처신하는데 예절이 있고 가문에는 틀이 잡혀야 하며, 현금(玄琴)을 뜯으며 시가(詩歌)를 알아야 하며, 붓을 들면 매난국죽 쯤 멋지게 그려야 하는 것인데, 이름이 기생이요, 기생은 천인으로 치고 보니 두수없이 밑바닥에서 허덕여야 했다."(이서구, 「극장」)
널리 불린 『춘향전』의 한 가락을 들어보자.
충효 열녀에 상하 있소? 자상히 들으시오. 기생으로 말합시다. 충효 열녀 없다 하니 낱낱이 아뢰리다. 해서(海西) 기생 농선(弄仙)이는 동선령에 죽어 있고, 선천 기생 아이로되 칠거학문 들어 있고, 진주 기생 논개는 우리나라 충렬로서 충렬문에 모셔 놓고 두고두고 제사를 지내며, 청주 기생 화월이는 삼층각에 올라 있고, 평양 기생 월선이도 충렬문에 들어 있고, 안동 기생 일지홍은 생열녀지문(生烈女之門) 지은 후에 정경가자(貞敬加姿) 있사오니 기생을 너무 업수이 보지 마옵소서.
조선왕조 시대에는 지방 관청에 관기(官妓)가 있었다. 관비(官婢)와는 엄연히 구별되어 수령 등의 잠자리를 맡았다. 관기제도는 조선 말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되고,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관기이면 딸도 관기가 되었다.
허균은 지방의 벼슬살이나 여행길에서 함께 잠을 잔 기생들의 이름을 그날그날 기록하였다. 당시 관리가 지방 출장을 가게 되면 으레 기생들이 수청들게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은 양반 체면 때문에 기생과의 동침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허균은 너무 솔직하고 인간적인 성품 탓으로 자기와 함께 지냈던 여자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이 때문에 체면을 중시하였던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그를 경박하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어머니 상중에 기생과 놀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패륜아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파행이었다.(이 부문은 뒤에 상론)
그러나 그는 "남녀 사이의 정욕은 본능이다. 이를 검속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성인을 따르기보다는 본능을 따르겠다"고 말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이것은 그의 호방한 태도와 인간 평등주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는 귀족주의적인 출세길보다는 백성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며 다른 사대부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고도 신분제도라는 틀 때문에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과 일반 서얼들을 동정했기 때문이었다.
허균의 '기생관'은 남달랐다. 부안기생 계랑 매창(梅窓)과 사귀었던 그는 편지에서 십년 동안 사귐이 유지될 수 있었던 사연을 진솔하게 토로한다.
매창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 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 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져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 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