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엄격한 국법의 예에 따라 왕릉 조성의 절차가 이어진다.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중국 왕조의 황릉처럼 화려하게 만들진 못했지만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당대 최고의 지관들이 동원되어 심혈을 기울여 왕릉의 위치를 결정했다. 왕릉의 위치가 결정되면 본격적으로 왕릉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는데 능은 위치나 특별한 사정에 의해 조금씩 규모나 양식은 달라졌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다.
왕릉 입구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제실이 있고, 이어서 조그만 냇가를 건너면 이곳이 신성한 장소임을 표시하는 붉은색 홍살문이 우리를 맞아준다. 홍살문에서부터 참도라는 길이 본격적으로 이어지는데 참도의 가운데 부분은 왕의 영혼이 다니던 신도라 하고, 옆의 부분이 왕이 실제로 지나가는 어도라고 부른다.
참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지붕이 ㅜ자 형태로 튀어나온 정자각과 그 위로 솟아오른 왕릉의 봉분이 어렴풋이 보인다. 정자각은 향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던 장소로 정자각 내부에 제사상은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사진 모형이 남아 있어 왕실의 제사상은 어떤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정자각 뒤편은 능침 구역으로 왕과 왕비가 묻혀있는 봉분은 물론 무인상과 문인상 등 여러 석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 구역의 출입은 보통 금지되었고, 특별한 날이 아니면 멀리서만 봐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연스레 조선왕릉의 관람은 문화재, 유적답사의 느낌보다는 자연을 즐기고, 숲을 거니는 공원의 산책처럼 여겨진다.
비슷비슷한 양식과 구성으로 왕릉과 묻혀있는 인물들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다면 자칫 지루한 여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왕릉인 만큼 열린 마음으로 마주 본다면 그동안 안보이던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양주는 경기도의 다른 도시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조선왕릉이 많기로 유명하다. 서오릉과 서삼릉이 위치한 고양과 동구릉의 구리와 달리 대규모 왕릉 군은 없지만 남양주의 자리 좋은 곳 여기저기에 여러 사연을 가진 왕릉들이 분포해 있다.
그중에 나의 발길이 먼저 닿는 곳은 바로 영화 <관상>의 주인공이자 계유정난으로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가 묻힌 광릉이다. 꽤 이름을 알린 왕의 무덤이지만 현재 광릉은 세조의 이미지 보단 국립수목원(예전에는 광릉수목원)의 울창한 숲으로 이름난 곳이다.
광릉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양주의 회암사지를 관람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통해 접근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수도권 순환 고속도로에서 퇴계원 ic를 나와 남양주의 중심부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왕숙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아마 한적한 여행을 선호했다면 전자를 택했겠지만 남양주의 현재 상황을 적나라하게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왕숙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빠르게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는 신도시의 광경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수도집중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왕숙천을 따라 신도시가 조성된다면 진건, 진접, 별내, 퇴계원 등으로 생활권이 각기 떨어져 있는 남양주를 한 곳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건 도움이 되겠지만 한편으로 예전의 아름답고 한적했던 남양주의 풍경은 점점 사라져 가는 게 아쉬웠다.
각설하고, 어느덧 진접을 지나 광릉숲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초입은 일명 '광릉내'라고 부르는 마을로 주말마다 많은 사람들이 광릉숲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옴으로써 자연스레 먹거리타운이 형성되었다.
예전 80년대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심상치 않은 듯 84년부터 영업을 해온 한 식당이 눈에 띄었다. 외식의 역사가 비교적 짧고 변화가 빠른 한국에서 40년 가까이 장사를 했다는 의미는 맛은 최소한 디폴트 값 이상 보장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과연 버섯과 견과류 등이 들어간 돌솥밥과 불고기를 같이 곁들여 먹으니 역시 예상대로다.
이제 본격적으로 광릉숲을 탐사해 볼 차례다. 봉선사를 지나 초입으로 들어서자마자 키가 웃자란 활엽수들이 쭉쭉 뻗어 하늘을 막아 늘어서 있고, 빈틈없이 들어찬 수많은 나무와 식물들이 뿜어내는 녹색 싱그러움과 흙냄새가 나의 코를 시원하게 자극한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이런 공간이 아직 남아있는 자체가 신비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광릉숲은 조선 세조가 생전에 직접 이곳을 둘러보고 장지를 정한 이후 경작과 매장은 물론, 조선시대 460여 년 동안 풀 한 포기 뽑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보호지역이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금단의 구역이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 혜택을 일반 시민들 누구나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수백 년간 잘 보존된 원시림을 차를 타고 지나가는 호사를 누리면서 새삼스레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광릉숲은 자동차뿐만 아니라 도보로 잘 다닐 수 있게 트레킹 길이 조성되어 있다.
봉선사에서 시작해서 광릉을 거쳐 국립수목원으로 이어지는 루트로 총 3킬로미터의 거리로 구성되었으며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어느덧 광릉이라 써진 주황색 표지판과 함께 광릉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힌 광릉에 도착한 것이다.
광릉숲의 원래 주인이자 우리에게는 수양대군이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세조는 조카와 신하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생전에 저질렀던 악행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월정사, 낙산사 등 여러 불교 사찰들을 중흥시켰으며 석실과 병풍석을 조성하지 말고 무덤을 간소하게 만들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천천히 숲을 가로지르며 세조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를 되새겨 본다. 왕이 되고 나서 비교적 무난한 정책을 펼쳤지만 명분이 없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권 자체가 유지할 동력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세조는 공신들에게 권력을 마음껏 나눠주며 이른바 형님정치를 펼치게 된다. 공신들은 제어할 윗선이 없기에 수탈을 갈수록 심하게 하고 백성들의 피해는 더욱 극심해진다.
쿠데타라는 행위는 현대에도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반복되고 있다. 저 멀리 미얀마에서도 그 피해는 계속되고 있지 않는가? 어느덧 정자각에 오르니 동원이 강릉(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해서 왕과 왕비의 능을 따로 모신 형태) 형식의 광릉이 위엄한 자태로 우뚝 서 있었다.
왼쪽 언덕의 봉분이 세조가 묻힌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봉분은 성종을 수렴청정했다고 알려진 정희왕후의 능이라 한다. 세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후손들에게 좋은 숲 하나 물려준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그 숲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수목원 국립수목원으로 한번 가보도록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일주일 후 작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ugzm87와 블로그 https://wonmin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