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에 보면 나이만큼 풍부한 인생 경험을 가진 70세의 벤(로버트 드 니로)이 나온다. 벤은 창업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의 성공신화를 이룬 줄스(앤 해서웨이)가 운영하는 회사에 인턴으로 지원하고 채용된다. 젊은 최고경영자와 나이 든 인턴이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는 신기했고,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따뜻했던 기억이다.
영화를 보고, 그 나이에 인턴에 지원하는 것과 나이 든 인턴을 채용하는 것이 놀라웠던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는 영화적 상상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어 우리는 왜 안 될까, 잠깐 의문을 가졌었다. 요즘 말로 능력치 '만렙(게임 캐릭터의 최고 레벨)'을 갖춘 사람이 새로 입은 지위에 맞게 급여 수준은 낮추고 가진 능력은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인생 경험이 무기가 되고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 직장 생활이라니. 분명 영화적 상황임에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을 만큼 부러움이 컸던 것 같다. 나이 든 세대와 날마다 가까워지는 현실 때문이었지만, 나이라는 편견이 그만큼 크고 완고하기 때문에 아직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을 정리했다.
당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직업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라고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던 중이었다. 나이에 대한 주변의 그런 인식은 스스로를 나이 안에 가두게 만들었다. 이어 나이에 맞게 하루하루의 생활이 무력하고 버겁게 느껴졌고, 이제는 일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나이를 염두에 두다 보니, 주위의 시선이나 다가오는 말들에 부담을 많이 느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장난처럼 함께 따라왔지만 장난스러운 말을 가장한 진심으로 생각될 때가 많았다. '돌려 까기' 식의 말에 움츠러들었고, 그 말이 몸을 지배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3년을 더 일했고, 3년 전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3년 만에 도전한 취업, 결과는
불과 한 달 전, 취업 연령제한의 끝자락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청소년 재단의 공무직에 지원했다. 수십 가지의 서류와 여러 항목으로 나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서류를 제출했다. 요행인지 서류전형은 통과했다.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했지만, 나이는 많이 걸렸다. 드디어 면접을 보러 가던 날, 새벽부터 시작된 눈송이가 굵게 내리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지나고 나니 아쉬움이 남았다. 마음속으로는 좀 더 젊은 사람을 선택할 거라는 부정적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긴장을 잘 안 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긴장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긴장을 했어야 했나 싶었다. 보수가 적은 것에 대해 면접관은 괜찮냐고 물었고 보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공무직의 급여 수준을 알고 있었고, 내게 수입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출퇴근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면접은 끝났고 합격자 발표도 지났다. 명단에 내 번호는 없었다. 절박함이 모자랐나 생각도 들었다. 단 한 명 뽑는 자리에 십 수명이 지원했고 어렵게 면접 기회까지 얻었지만, 나의 취업 도전은 거기까지였다. 영화처럼 멋진 직장 생활을 꿈꿨지만, 직장생활은, 더구나 아이들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것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해왔어도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 일터가 3년도 안 지나 그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해 보고 싶었다. 돌봄 청소년을 위한 교육 담당이었으니, 15년을 해온 나의 경험과도 꼭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인턴>의 벤처럼 잡다한 일도, 아이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역할도, 맡겨진 어떤 일도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다. 나의 세대는 정년퇴직에 밀려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신중년'이라는 정책적 이름으로 불리는 그 세대는 2017년 기준 1,378만 명으로 인구의 1/4이고, 생산가능 인구의 1/3 수준이라고 한다(2018년 고용노동부 발표). 경력도 풍부하고 자부심도 높지만 기대수명이 증가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한다. 삶은 길게 남아 있는데 경제 활동은 사라졌고, 하루 24시간을 온통 등산, 여행, 산책으로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사는 부천시에서는 '중년 이모작 프로그램'이 있다.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해서 자세히 살폈지만, 인생을 설계해주고 경제 컨설팅도 진행하고 취미 생활이나 소모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있었다. 배운 것을 활용해서 상담 활동도 할 수 있고, 재능기부로도 활동할 수 있다. 최저 시급에 준하는 보수를 받으며 하루 한두 시간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고 한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선택된 몇몇만.
정부에서 추진하는 '신중년 3 모작 패키지' 사업이란 것도 있다. 생애설계, 교육, 일자리 지원, 창업 지원 등이 있다고 한다. '중년 이모작 프로그램'이나 '신중년 3 모작 패키지'나 체계적인 지원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정상적인 취업은 당연히 어렵고, 창업에 도전하는 것도 초기 진입장벽 해소와 정착 성공률 제고 등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2019년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 '보건복지포럼'의 '신중년의 노후 인식 실태와 시사점'(김경래 부연구위원)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52.6퍼센트가 노인의 연령 기준을 '70세~75세 미만'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신중년인 베이비 부머 세대는 아직 경제활동을 해야 하지만 그들의 경력은 단절되었다.
'신중년'인 내게 은퇴란 없다
'신중년(5060) 경력 설계 안내서'(한국고용정보원, 2019)에는 신중년을 위한 5가지 준비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은퇴 후 변화에 대비하기', '나다운 삶을 위한 직업 선택하기', '경제적으로 탄탄히 준비하기', '주변과 풍요로운 관계 맺기', '여가와 건강 알차게 챙기기' 등 5가지다. 모두 좋은 말이지만 정작 현재의 '신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쏙 빠진 공허한 구호처럼 들린다.
사실 나는 '신중년'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다. 생산적 활동을 하고 싶어 하루 두세 시간 상담과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이다. '나다운 직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다. '경제적으로 탄탄한 준비'를 위한 것은 못 된다. '여가와 건강을 알차게 챙기기'는 애쓰고 있다. 나이의 속도에 비례해서 겁나게 빨리 지나는 하루지만 보람차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고민 없이 실행하는 편이다. 남들의 시선에 이전처럼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실패해도 시작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기에 앞으로도 무언가에 대한 도전은 이어질 것 같다. 배우 윤여정은 76세에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72세인 최백호의 노래는 여전히 낭만에 젖게 한다.
영화 <인턴>의 벤처럼 일흔도 여전히 멋진, 은퇴 없는 삶을 가꾸고 싶다. 벤은 말한다.
"뮤지션한테 은퇴란 없대요. 음악이 사라지면 멈출 뿐이죠. 제 안엔 아직 음악이 남아 있어요."
'신중년'인 내게도 은퇴란 없다. 음악이 있고, 그 음악이 멈출 때까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생산적인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