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독일에 오고 나서부터 크게 이상이 바뀌었다. 이십 대에는 내 삶의 의미와 돈벌이의 방법이 일치해야 마치 정답인 삶인 마냥 살았다. '적당히'라는 걸 잘 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삶을 꾸리는 벌이가 안 되는 내가 사랑하는 직업을 위해 투잡이고 쓰리잡이고 마다않고 젊은 정신과 육체를 굴렸다. 늘 어깨가 무겁고 피곤했고, 잠 못 이루는 고민이 많았다. 그만큼 배우기도 했고,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온몸으로 새겼던 시간이었다.
허나 독일에 온 이후 외딴곳에서 뿌리 없는 존재로 삶을 영위하자니 일을 가릴 게 무엇, 당장 월세와 먹고 지내는 데 필요한 비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이것저것 했다. 독일에서 한글연구과정 실험 참여, 명품 판매, 한국 물류회사, 재즈카페 알바생, 난민단체 프로젝트 플락티쿰, 교회 유아반 선생, 한글학교 선생 등등... 그렇게 일을 해보니 내 적당한 시간과 에너지, 재능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그 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최고라는 생각에 점점 확신을 갖게 됐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건 당연할지언정, 나는 내 인생에서 그것을 제대로 알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러면서 직업(돈벌이)과 개인의 삶의 균형감과 만족감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로도 충분한 벌이를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흔치 않은 행운이란 사실도 배우고 말이지. 결혼을 결심한 후, 다시 독일에 돌아와서는 무엇보다 워라밸을 유지하며 적당히 벌고 내 개인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럼에도 불구 내가 좋아하는 선상에 놓여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다.
어쩌다, 유치원 선생님
그러던 중 주변에서 말할 적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아우스빌둥(직업학교)에 관한 선택지가 유난히 가슴에 꽂혔고, 운명의 목소리라도 되는 듯 몇 차례 롤모델을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주 정부 자격의 시 보육교사' 과정이었다. 사실 이 직업에 대해 망설였던 건 한국에서 가져온 '유치원 선생님'에 대한 편견이었다. 부모 아이 상대로 심히 고생하고 박봉에 시달리고...
이곳 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해선 유아교육기관 및 학교 방과 후 교육 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도시를 바꿔서도 동등한 자격으로 일할 수 있다. 나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천주교계 단체 산하 8개 유치원 중 가장 큰 유치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 긴급보육지원으로도 사회 최전방에 서 있던 아이들의 교육기관은 늘 구인공고가 사라지지 않았다.
기관마다 계약 조건이 다르긴 하겠지만, 나는 학교의 프로그램상 현재 해당 유치원서 주 17시간 일하고 나머지 22시간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그러면서 받는 급여는 거의 한화 세전 150, 이것도 매년 100유로씩 오른다. 둘이 벌면서, 견습생으로선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더군다나 1년 30일 정기 휴가에 칼퇴는 물론이거니와 크리스마스 보너스와 이번 코로나로 사회필수노동자그룹 특별 보너스도 받았다. 그리고 산후 휴가는 물론, 병가에 있어서도 보장이 잘 되어 있다.
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크게 나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매일 만나는 이 일이 생각보다 내게 잘 맞는다는 걸 느끼고 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워낙 많은 나에게 이렇게 공식적이고 의무적으로 다른 타인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또 여러 반응과 교육적 스탠스를 취하며 인간의 존재를 만들어 가는 데 동참할 기회를 갖는다는 게 참 귀하고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처럼 부모들이 교육에 한국만큼 관여하지 않고(선생 개인정보 학부모들과 절대 나누지 않음), 또 아이들을 마냥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으로 생각하지도 않고(아이들이 자기 밥 스스로 먹고 치우고, 장난감 정리하고) 프로그램이라든지 그 사회적 시선이 다르기 때문에 일이 훨씬 수월한 것도 있다. 워낙 뭐가 없어서 견습생인 내가 매주 프로그램을 스스로 고민해가기도 한다.
우리 고용주인 단체는 뒤셀도르프에서 20년 전 마약중독의 노숙인들 대상으로 사회복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커진 단체로 현재는 가족, 청소년 그리고 노숙인 등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 기관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다른 분야의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기회가 엿보고 있다. 지금 배우고 있는 과정을 마치고 나에게도 직업적 수완이 생기면, 노숙인 및 난민들을 직접 만나 함께 프로젝트를 할 날을 상상해 해본다.
시간이 생기면 동네 녹색당에도 가입해서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비슷한 직업 분야의 한국인 및 독일인들과 아동교육 및 발달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눠보고 싶다. 우리 동네에 일본인 유치원은 있는데, 한국인 유치원은 왜 없을까? 그것도 신기하고... 아무튼 아직까진 이 세계를 만나는데 흥분이 넘친다.
그런 의미에서 나름 '해볼 만한' 이 직업적 경험을 오롯이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기 위해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따서 내 눈으로 본 <독일에서 만나는 어린이라는 세계> 제목으로 꾸준히 기록해보려 한다. 양육하고 있는 분들 혹은 나와 비슷한 분야의 종사자들, 아니면 자신의 또렷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비교하여 여러분의 다양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싶다. 그러면서 한 인간존재를 키워나가는데 서로의 지혜를 보태다 보면, 다음 세대 조금 더 나은 사람들의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 본다.
아래 사진은 처음 이 일을 시작하고 2주 뒤 생일을 맞이한 나에게 옆 나비반 아이가 그려준 그림. 이름 철자도 거꾸로지만 그림에서 묻어나는 에너지가 좋아서 직업교육기간 모토로 삼으려 액자에 예쁘게 꽂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