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얻는 자는 번창하고, 때를 잃는 자는 망한다." - 열자(列子)
사람들은 어떠한 일을 시작해 놓고,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면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갈까 전전긍긍하며 심하게 조바심을 친다. 일이 풀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3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는 무리를 해서라도 그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간다. 박력은 있지만 조금 무모한 형이다. 두 번째는 아예 단념을 하고 그 일 자체를 포기하는 형이다. 세 번째는 '우(迂)'의 길, 즉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형이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 세 번째 길을 선택한다. 이 방법은 중앙돌파의 무모함이나 중도에 포기하는 비생산적인 방법보다는 나은 제3의 길이다. 중국인들처럼 기다린다는 것에 철저한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가 있는데 그들은 끈기 있게 기다리고 끈기 있게 돌아간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들은 오래 참으면서 정세가 변하여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대륙적이니, 대륙적 기질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군쟁론에 유명한 '우직(迂直)의 계(計)'란 말이 있는데, 손자는 거기서 '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어려움은 우(迂)로서 직(直)을 만들고 환(患)으로서 이(利)를 만든다는 점에 있다."
가령 적보다 늦게 출발하면서 일부러 길을 돌아 적을 안심시키다가 틈을 타서 오히려 먼저 도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직의 계'라고 한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종이 한 장 차이인데 승리의 열쇠는 우직의 계를 아느냐 모르냐에 달려 있다.
전군을 일시에 투입해서는 승리를 거두기 힘들다. 또 세를 믿고 부대를 적진 깊숙이 진격시켰다가는 보급에 문제가 생겨서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 유일한 방법은 적보다 앞서 우직의 계를 사용하는 것인데 그러면 반드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이것이 전쟁의 원칙이다.
여기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우'에는 장소의 '우'와 시간의 '우'가 있다는 것이다. 장소의 우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시간의 우는 바로 정세의 변화를 기다리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국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생활 철학이다. 그것은 병법서인 손자에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중국을 이끌어 온 모든 성현들이 만들어 낸 행동의 전범인 것이다.
때를 기다리는 군자
장자가 어느 날, 군데군데 꿰맨 베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해어진 짚신을 신고 위나라의 혜왕을 찾았을 때 혜왕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처럼 차림이 누추하십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이것은 가난한 것이지, 누추한 것이 아닙니다. 선비로서 도덕을 가지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누추한 것이지마는, 옷이 해어지고 신이 뚫어진 것은 가난한 것이지 누추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이른바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장자, 산목편(山木篇)
이 점에 있어서는 공자도 다를 바가 없었다. 공자는 후세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세속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불우한 생이었다. 공자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고향이 노나라를 떠나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위. 조. 송.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받아들이는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공자는 그렇게 떠돌아다닌 자신의 처지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상갓집 개에 비유하며 쓸쓸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상가지구(喪家之狗)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列國)을 주유고 다닐 때의 일이다. 정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버린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동쪽 문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초조해진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나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를 찾았다. 제자들 중에서 자공(子貢)이 가장 열심히 사방으로 스승의 행방을 묻고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정나라 사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 세치쯤 미치지 못하였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초상집의 개(若喪家之狗)와 같았소."
제자들을 만난 공자는 자공이 전하는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용모에 대한 말을 맞다고 보기 어렵지만 초상집 개 같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상가지구'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는 그렇게 때를 기다리며 30여 년 동안 무려 72 명의 군주를 만나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지만 포부를 펼칠 왕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불우를 탓하며 중국에서 도가 실현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겠다고까지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죽을 고비를 만나기도 했고, 굶주림에 처하기도 했다. 참으로 불우한 삶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65세의 나이로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00여 명의 제자들을 길러내며 제자들의 교육에만 전념을 한다. 아마 이 시기가 공자의 생애 중에서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는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실력을 쌓아두면 때를 만나게 된다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일이다. 무제는 즉위하고부터 학문을 장려하고 학자를 우대하면서 전국에 유능한 선비를 추천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공손홍(公孫弘)이란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이미 예순을 넘은 나이였다. 그는 돼지를 키우며 마흔 살에 공부를 시작해서 발탁이 된 늦깎이였다.
무제는 공손홍이 나이든 노인이었지만 의젓한 풍모가 매우 마음에 들어 박사에 임명했다. 과연 공손홍은 견문이 넓고 대인의 풍도(風度)를 지닌 사람이었다.
"임금의 병은 마음이 넓지 못한 데 있고, 신하의 병은 검소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데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언제나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한 그는 조정 회의 때에는 완벽한 자료를 수집해서 황제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찬성할 수 있는 점과 찬성할 수 없는 점을 함께 말해서 황제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그는 또 상대방의 잘못을 정면으로 지적하거나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무제는 이러한 공손홍이 사무에 정통하면서도 거기에 유학의 이념을 세련되게 가미하는 점을 매우 높이 평가해 그를 총애했다. 그는 자기의 의견이 황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조정에서 캐고 따지지 않았다. 그럴 때는 급암이라는 대신과 함께 황제가 한가한 틈에 찾아가 만났다. 그때도 급암이 먼저 말을 꺼내고 자신은 뒤에 동의하는 식으로 했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언제나 기분 좋게 그것을 받아들이곤 했다.
공선홍은 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탓에 늦게 출발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젊은 시절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 뒤늦게 성공하는 늦깎이가 있다. 그들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보면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목표를 잃지 않았고, 인내를 가지고 그 목표를 달성함으로서 자아실현에 성공하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다.
이들이야 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