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때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그 안에 가로 53cm 세로 77cm의 그 유명한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봤다. 왜 그 그림이 유명한지 가이드는 잠시 설명을 해줬다. 한때 이탈리아의 유리공 빈센초가 그 그림을 훔쳤는데, 그를 잡고 난 뒤부터 유명세를 탔다고.
사실 그 그림을 보기 전에 누군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그림은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네 눈과 마주칠 거야." 그 말 때문에 그 그림을 중앙에 놓고 나는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역시나! 그녀의 눈은 내 눈을 떠나지 않았다. 참으로 신비로웠다.
그때 새로운 궁금증도 생겼다. 과연 그림 속 모나리자는 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것. 그림을 보는 내내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냉엄할 정도로 무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마치 내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 같았다. 이른바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얼굴. 더욱이 선거철만 되면 그 전과 달리 활짝 웃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정치인들의 얼굴이 그렇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위대한 것은 그 부분에 있지 싶다. 그 얼굴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러니 그림 속 실제 주인공이 '조콘다' 부인이라는 걸 모른다 해도, 그 그림 기법이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라는 걸 알지 못해도 상관이 없지 않으랴! 그림을 전공할 바가 아니라면 그 그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을까?
'현재'의 눈으로 거장의 그림을 보다
문하연의 〈다락방 미술관〉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더욱 하게 됐다. 그녀는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간호사 생활을 했지만, 그림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 덕에 10년간 미술을 감상하고 미술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예술 분야의 글을 썼다.
그 에세이를 엮은 게 이 책인데, 여기서 15~17세기 미술, 19세기 근대미술, 20세기 미술, 그 밖의 현대미술 등 각 시대의 거장들과 그림을 소개한다. 다만 과거 시점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 시점을 해석해주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찔리는 끔찍한 상황에도 놀라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16세기에도, 지금도, 현실은 다르지 않나 보다. 벨리니는 비극적인 상황을 더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주변에 무관심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려 넣었다. (56쪽)
이는 조반니 벨리니의 <순교자 베드로의 암살>을 보면서 깨달은 그녀의 생각이다. 그 그림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배경은 숲속이고, 왼쪽에는 베드로가 칼에 찔리고 있고, 정면에는 보조 수사 한 명이 잡혀 있다. 그 숲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저 평화롭게 나무를 하고 있단다.
그녀는 그 그림을 보면서 2009년 1월 20일의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를 떠올렸다. 그때 일어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했는데, 검찰은 철거민들의 화염병으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결론을 짓고, 철거민 25명까지 공동정범으로 묶어 형사 처벌했다.
그런 일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났는데도, 마치 그림 속 나무꾼들처럼, 그녀는 너무나 무관심했다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16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걸 그녀 스스로 자각한 것이다. 다들 애써 모르는 척하며 자기 나무만 벨 뿐이니.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당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냐고 물었다. 피카소는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라고 답했다. (153쪽)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얽힌 이야기를 그녀가 짧게 소개한 것이다. 1937년 4월 공화당의 반대파인 프랑코 정권의 요청을 받은 나치가 24대의 폭격기로 스페인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참히 폭격한 일로 지역 주민 2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스페인 출신 피카소가 그 소식을 접하고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할 그림 작업을 멈추고 오직 〈게르니카〉에 몰입했다는 거다. 그것도 일곱 번의 수정 과정을 사진으로 남길 정도로. 그 그림을 두고 나치가 피카소를 몰아세울 때 그토록 대범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에만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란다. 1951년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황해도 신천 지역의 대학살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 그림에는 임신한 여인과 아이를 안은 여인과 흙장난하는 아이를 향해 로봇처럼 서서 총을 겨누는 군인들이 있다. 피카소는 학살의 주체보다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인간의 무자비함과 잔혹함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피카소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있다는데, 그녀는 피카소가 '큐비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까닭이라고 말한다. 큐비즘이란 원근법을 없애고 사물이 보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단면을 분석해 평면적으로 캔버스에 펼쳐놓는 기법이란다. 피카소의 그림이 초현실주의처럼 난해해 보이지만 실은 사물을 해체해 그 단면을 분석하여 재구성한 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런데 어쩌랴? 피카소의 그 그림 기법과 그의 작품들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해도, 그림의 전공자가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만 기억해도 좋지 않으랴! 피카소는 전쟁의 아픔을 자기 몸으로 부둥켜안으려 했던 사람이라고. 그것도 제 나라는 물론 우리나라의 아픔까지 껴안고자 했다고. 그것 하나만 기억해도 이 책을 읽는 보람은 충분치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