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귀환.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승자, 오세훈이 다시 서울시장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만 9년 7개월 만이다. 그는 2011년 8월 26일 "주민투표의 결과에 책임을 지고 오늘 시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 제 거취로 인한 정치권의 논란과 행정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즉각적인 사퇴로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중도하차했다. 당시 서울시의회의 무상급식 조례안 통과에 반발, 시장직까지 걸고 강행했던 주민투표가 투표율 미달로 개표조차 못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이 결론에 펄쩍 뛰었다. 당시 홍준표 대표는 "(오 시장이) 사전협의 없이 주민투표를 강행했고 '주민투표 무산시 즉각 사퇴가 아닌 10월 초 사퇴하겠다'는 약속까지 저버렸다"고 그를 비난했다. 오 당선인이 '자기 정치'를 위해 정부·여당에 부담을 안겼다는 취지였다. 박원순 전 시장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후엔, "서울의 잃어버린 10년은 오세훈 탓"이란 책임론까지 보수진영 안에 뿌리 박혔다.
한때 개혁보수의 상징이자 보수정당의 차기 지도자로 꼽히던 그가 가시밭길을 걷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약 10년 만에 다시 서울시장으로 귀환하면서 가시밭길이 끝나고 새 길의 초입에 이르렀다.
10년 만에 다시 찾아온 변곡점
돌아보면 '정치인 오세훈'의 변곡점은 10년 주기였다.
오세훈 당선인은 2000년 16대 총선 때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영입으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이미 그때도 '스타 변호사'로 유명했던 그였다. 1993년 대기업을 상대로 한 일조권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환경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각종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1996년 <동아일보>에서 조사한 '결혼하고 싶은 남자' 6위에 오르기도 했다. 남성복·정수기 광고 모델도 맡았다.
그런 그에게 16대 총선은 어려운 관문도 아니었다. 특히 한나라당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서울 강남을에 공천 받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오 당선인의 주가를 더 높인 건 '개혁보수'란 이미지였다.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국민들의 정치개혁 요구가 드높았던 때,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를 맡아 이른바 '오세훈법'을 만들었다(2004년). 기업의 후원금 기부금을 금지했고, 국회의원 후원회로만 정치자금을 모으게 했다. 또한 당시 '돈 먹는 하마'라고 비판받던 지구당마저 폐지시켰다. 이는 현행 정치자금법의 기본 뼈대로 여전히 기능 중이다.
당의 인적쇄신에도 열성이었다. 그는 남경필·원희룡·정병국 등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이었던 '미래연대'에서 활동하면서 2003년 당 연찬회를 전후해 '5·6공 인사 퇴진론' 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정풍운동을 벌였다. 또 재선이 유력시 되던 상황임에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당의 세대교체를 견인했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는 정치역정의 '최고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참여정부 법무부장관 출신 강금실 열린우리당 후보에 맞설 대항마로 긴급 차출된 그는 당내 경선에서 맹형규·홍준표 등 경쟁자들을 꺾고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강금실 후보를 33.74%p 차로 꺾었다. 이때 오 당선인의 나이는 46세.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이었다.
시장 재임 땐 '디자인 서울'을 강조하면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광화문 광장 등 대형 토목사업을 잇달아 추진했다. 세빛둥둥섬과 경인아라뱃길, 수상택시 등 '한강르네상스' 사업도 그 일환이었다. 주변 전세시세의 80% 이하로 최장 20년간 살 수 있는 장기전세주택 '시프트(Shift)'도 오 당선인의 시장 재임시 역점 사업으로 볼 수 있다. '전시행정' '혈세낭비' 등의 비판과 논란이 따라 붙었지만, 일각에선 서울시의 청렴도와 도시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렸단 긍정적 평가도 내놓는다. 이 때문이었을까. 오 당선인은 야권 단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2010년 지방선거 때도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0.6%p 차 신승을 거뒀다.
하지만 '정치인 오세훈'의 상승세는 여기까지였다.
쉽지 않았던 야인 탈출기
2011년 8월 이후 그는 오랫동안 '야인(野人)'이었다. 시장직 사퇴 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등을 지내면서 정치권과 거리를 뒀고, 2014년엔 KOICA 중장기자문단 신분으로 르완다와 페루를 방문했다. 귀국 후 자신의 정책구상을 담은 책 <오세훈, 길을 떠나 다시 배우다>를 내고 대학 특강·토크콘서트 등을 진행했다. 정치적 재기를 위한 '워밍업'이었다.
그러나 패배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오 당선인은 2016년 20대 서울 종로구에 도전장을 냈지만 당시 정세균 후보에게 패했다. 선거기간 내내 최대 17%p 이상 앞섰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지만, 개표 결과는 오히려 자신이 약 12%p 차로 패한 결과였다. 2017년 탄핵 정국 땐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을 탈당, 바른정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바른정당과 국민의당 합당(바른미래당의 전신)에 반발해 다시 2018년 11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으로 복귀했다.
2019년 2월엔 "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당권 도전에 나섰다. 자신을 당의 '개혁보수'로 자리매김하면서 중도층 공략을 주문한 것. 하지만 당시 승자는 '당심'에서 우위를 차지한 황교안 전 대표였다. 오 당선인은 당시 일반국민 여론조사에서 황 전 대표를 12.5p 차로 앞섰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32.4%p 차로 크게 밀렸다.
오 당선인은 이후 '당심'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2019년 10월, 전광훈 목사 등이 주도한 '문재인 탄핵 집회(광화문 집회)'에 참석해 "저 정신나간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헌정유린죄로 당신을 파면한다" 등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2020년 4월, 21대 총선 결과도 패배였다. 그는 서울 광진을에서 고민정 민주당 의원과 맞붙었으나 2.6%p 차로 패했다.
사실 이번 선거 때도 그를 향한 전망이 밝진 않았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울시장을 이미 두 번씩이나 하신 분이고 자기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온 사람"이라며 오 당선인의 출마 가능성을 낮췄고, 먼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선언을 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게 합당·입당을 촉구하는 '조건부 출마' 선언을 하면서 당내 논란을 빚었다. 1차 당내 예비경선 땐 역시 '당심'에서 또 밀리는 양상을 보이면서 나경원 전 의원에게 패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가 하면, 안철수 대표와의 단일화 과정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결과적으론 이 모든 부정적 전망들을 돌파한 게 도움이 됐다. 오히려 경선 승리·단일화 성공 등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지난 10년 간 유보됐던 패배의 이미지를 탈출할 상승세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본 선거에 상당부분 반영된 셈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다른 내일 만들까
10년만의 귀환이지만, 오세훈 당선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 3개월이다. '어제'를 극복하고 '내일'을 제시할 때 '정치인 오세훈'의 이번 변곡점은 또 다른 상승세의 시작일 수도 있다.
선거과정에서 이미 수많은 '어제'가 언급됐다. DDP와 세빛섬 등에 대한 적자논란, "스피드한 재개발·재건축" 공약에서 재소환된 용산참사, 무상급식 관련 논쟁에서 드러난 복지 원칙 논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시장 재임시기, 처가 땅이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되는 데 관여했을 것이란 이른바 '내곡동 땅' 의혹도 제대로 해소해야 한다.
'내일'에 대한 우려도 선거과정에서 제기됐다. 사단법인 '서울사회적경제네트워크' 등은 지난 2일 박원순 전 시장의 주민자치·시민참여·사회적 경제 관련 정책들을 보류·폐기하겠다고 밝힌 오 당선인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24곳 자치단체장이 민주당 소속인 점, 서울시의회 109명 시의원 중 101명이 민주당 소속인 점을 감안하면, 그가 공약한 각종 도시계획과 개발사업들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는지 물음표가 찍히기도 한다.
오 당선인은 8일 당선 소감에서 "지금 이 순간 정말 기뻐야 할 순간인데 저 스스로 정말 가슴을 짓누르는 엄중한 책임감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면서 "(전임 시장 시절) 5년간 일할 때 머리로 일했다면 (이제는) 뜨거운 가슴으로 일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여는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