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생각하고 3분간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제를 받았다. 3분간은 쉼 없이 무슨 말이든 나오는 대로 쓰는 것이 룰이다. 중간에 고치는 것은 안 된다.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으면 '뭐지? 아, 어떡해. 쓸게 없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등등의 마음속의 말이라도 쉼 없이 써 내려가야 한다. 오타가 나거나 띄어쓰기를 수정해서도 안 된다. 나중에 고쳐쓰기를 통해 수정하면 되니까.
바짝 집중하고 글을 쓰니 다행히 의미 없는 아무 말을 쓰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글자가 틀리거나 띄어쓰기가 틀리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루에 다섯 번,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주제로 삼아 쓰는 훈련을 하고 있다. 강의를 이끄시는 훈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어색하지만 열심히 따라가려고 노력한다.
부천시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창의도시다. 문화창의도시 지정 사업의 일환으로 2017년부터 일인일저(一人一著) 과정이 만들어졌다. 한 사람이 책을 한 권 완성하고,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책 쓰기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번에 제4기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이름의 책을 갖는다는 것, 글을 쓰기를 욕망하는 사람에게는 꿈같은 일이다. 그 꿈같은 일을 해보겠다고 용기를 냈고, 매주 토요일이면 아침 일찍부터 화상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 4주가 지났다.
어설픈 글이지만 글쓰기를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일상생활의 무질서가 정돈되어가는 느낌이다. 걷고 쓰고, 밥하고 쓰고, 빨래하고 쓰고, 책을 읽은 후에 쓰고 영화를 본 다음에 썼다. 마치, 쓰기 위해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고, 쓰는 것으로 모든 삶이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일상을 지배하던 무기력감이나 상실감은 조금씩 거두어졌다.
길가의 풀 한 포기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고, 사람들의 발걸음에서도 의미를 찾았던 것 같다. 그게 좋았다. 삶의 온도를 포착하는 것, 모든 생명의 작용을 감지하는 촉수가 자라는 느낌들이. 그 촉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곳을 향했다. 내면의 미세한 변화도 감지했고 외부의 움직임 하나도 정성스럽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타고난 재능은 없지만, 말 그대로 글쓰기에 마음을 쏟으며 살고 있다. 글감을 모으는 것에 공을 들이고 예쁘게 다듬다 보니 삶도 가지런해지는 것 같았다. 먹고사는 데 소요되는 모든 일에 원칙이 정해졌고 지켜야 할 선이 그어졌다. 찰나의 소리와 흩어지는 것도 눈과 귀로 담았다. 산만한 조각들을 모으는 작업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하니 글이 조금씩 나왔다. 글이 나를 완성시켜 주는 것 같았다. 지나온 시간이 아쉬웠지만, 놓친 부분을 아까워하기보다는 지금의 삶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든 시간에 내가 존재하는 느낌이었고 행위의 주인은 내가 되었다. 삶이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내가 쓸 책의 큰 주제를 천천히 잡아가야 한다고 훈장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정체를 통해 나는 무엇을 쓰는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 누가 귀 기울일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읽었던 책에서, 유명한 이의 연설을 통해서, 노랫말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의 핵심을 전달하는지를 살폈다. 내 글쓰기를 규정하는 적합한 낱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전에 읽은 책들을 꺼내 보았다. 이것저것 훑어보다 글쓰기에 입문하고 처음 팬심을 가졌던 작가의 책을 펼쳤다. 작가의 강연이 있던 날, 강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기 위해 수줍게 책을 내밀었다. 그런 경험도 처음이었다. 그날의 강의 주제는 '나만의 언어를 갖자'는 것이었다. 작가는 '자기 언어를 찾아서'라고 적어 주었다.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이었는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내 삶을 풀어내는 나의 언어 찾기, 목표가 되었다.
작가의 책, <쓰기의 말들>에,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삶의 토대인 도시에서 콘크리트에 갇힌 인간의 내면을 탐사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대도시의 외곽, 수도권으로 불리는 중간 지대가 내 삶의 토대다. 아주 넉넉하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곳에서의 쉰일곱 도시인의 삶을 얘기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삶을 생각하다 보니 얼마 전 방송되었던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MBC에서 잠깐 방송되었던 <오팔이 빛나는 밤>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제목을 처음 들을 때, 오팔에 바로 나이를 떠올렸다. 본능적 연상이었는데, 역시나 방송에서는 50대 중후반의 연기자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일상을 소개하고 있었다. 운동, 취미, 일상의 루틴을 통해 건강하고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삶의 지혜를 배워보자는 프로그램이었다.
제목은 신선하다고 느꼈다. 나이 오팔을 빛난다고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쇠퇴하고 초라하고 몸도 마음도 최대치의 능력에서 급격히 하락하는 외적 특성이 맹렬히 드러나는 그 시기를, 빛난다고 포장하는 것이 좋았다. 늙어 가고 시들해지는 삶이 빛날 수 있다는 말에 끌려 잠시 시청했던 것 같다.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출연자들의 일상은 대부분은 그 나이 대의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방송의 언어로 빛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들의 빛남은 대부분 외적인 것을 거스르려는 노력들로 대체되었다. 내가 찾고 싶은 내면이 빛나는 삶, 삶 자체로 눈부실 수 있는 그런 모습, 인생을 완성해가는 시기의 여유와 관조를 찾고 싶었는데, 프로그램에서는 조급함이 많이 보였던 것 같았다.
어느새 오팔(나이)을 향해가고 있다. 보석 오팔은 '일반 보석과는 달리 물러서 흠집이 나기 쉽고 충격을 받으면 깨지기 쉬운 약한 보석(나무 위키)'이라고 한다. 보석과 마찬가지로 부서지기 쉬운 나이를 지나는 요즘이라서 나와 닮은 보석에도 친근감이 생기려고 한다.
요즘 들어 다양한 분야에 팬심이 생기고 있다. 국민 여동생이라 불린 아이유도 그중 하나다. 그녀가 부른 노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아이와 나의 바다>를 통해 내가 쓰고 싶은 것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일'과 '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맘이 가난한 밤'들의 이야기, '흔적만이 남아 희미한' 이야기, 아주 가끔 '지금도 설렘으로 차오르던 나의 숨소리'와 그래서 만들어진 지금의 겨우 이런 모습들을 낱낱이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생기 넘치고, 실패해도 파이팅 넘치던 예전의 내가 될 수도 없다. 여전히 어설프고 실수도 많고 게다가 까먹는 것들도 많아지는 요즘에, 나를 모른 척 외면하지 않고 글로 다독이는 내가 고맙고 다행스럽다. 나를 규정할 찰떡같은 단어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의 책에는 나의 그런 모자람도 담고 싶다. 부족한 것이 빛날 수 없다면, 빛나지 않는 나라도 쿨하게 인정할 수 있는 옹졸하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