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의 핵심 공간인 화성행궁은 겉에서 보았을 땐 여느 관아 건물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 격식이나 품격이 마치 궁궐의 축소판을 본 듯하다. 화성행궁은 건립 당시 21개의 건물 576칸의 규모로 지어졌고, 조선 행궁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도 화성행궁을 찾을 정도로 의미가 남다른 행궁이었지만 일제의 파괴를 피해 가지 못했다.
일제는 궁궐은 물론 예전에 관아로 쓰이던 곳을 집중적으로 훼손시켰는데 전각을 부순 자리에는 주로 관공서나 학교가 들어섰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 낙남헌, 화령전 등의 일부 전각만 남긴 채 거의 전 건물이 헐리는 아픔을 겪었다.
행궁의 터에는 수원시의 각종 관공서와 신풍초등학교 등 많은 시설들이 들어섰었다. 하지만 1997년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하여 화성행궁의 전각들은 다시 예전 모습을 찾게 되었고,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는 2단계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데 행궁 권역 내에 있던 11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풍초등학교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있었지만 광교신도시로 학교를 옮기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우화관을 다시 복원하고 있다. 원래는 2020년 복원 완료 예정이었지만, 2021년 3월 말 기준 발굴조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듯했다.
신풍루를 거쳐 좌익문, 중양문을 지나 중심 전각이라 할 수 있는 봉수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복궁, 창덕궁처럼 거대한 규모라 보기 힘들다. 하지만 건물 주위에는 회랑이 둘러쳐 있었고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으로 이어지는 구조와 격식 있는 붉은 단청이 이곳이 궁궐임을 깨닫게 한다.
정조가 집무를 보는 모습까지 재현해놔
드디어 행궁의 중심인 봉수당 권역으로 들어왔다. 봉수당은 임금 행차 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로 정조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진찬연)을 열었던 장소로 유명하다. 영화 <사도>에서 정조(소지섭 배우)가 어머니(문근영 배우)를 위해 직접 춤을 췄던 장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무래도 새롭게 복원한 행궁이라 역사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소품이나 마네킹으로 충실하게 재현해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문안을 올리는 장면이나 정조가 집무를 보는 장면을 마네킹으로 재현해 놓았다. 보통 고궁을 가면 화려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상당히 썰렁한 장소가 많아서 그 점이 아쉬웠는데 이를 풀어주는 포인트가 많았다.
봉수당의 오른편에는 화성행궁과 조금 떨어져서 다른 구역을 형성하고 있는 권역이 존재한다. 정조대왕의 어진이 모셔진 화령 전권역이 바로 그곳인데 행궁권역과 화령전 사이에는 바로 신풍초등학교가 있었다. 현재는 복원공사 중이라 주위가 상당히 어수선하지만 사람들이 꽤 붐볐던 행궁과 달리 화령전 구역은 오래된 사당에 나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하다.
주위는 고요하고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위엄 가득한 장소라 할 수 있다. 내부에는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운한각과 행랑으로 연결된 복도각, 그리고 제사를 지내던 부속건물인 이 안청으로 구성되었고 현재는 보물 2035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
화성행궁에는 드문드문 명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전각들이 남아있어 화성 행궁의 품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화령전의 정조 어진은 비록 6.25 전란 때 불에 타 새롭게 그려진 상상화지만 그의 얼이 담긴 화성행궁에 걸려있는 것이라 느낌이 남달랐다.
암울했던 조선 후기에서 한 줄기 빛이 되었던 정조는 적어도 수원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었고, 그가 만든 도시는 거대한 대도시로 성장했다. 정조는 하늘 위에서 뿌듯해하시지 않을까?
다시 행궁권역으로 돌아가면 행궁의 건물들과 등을 지고 화경전 쪽을 바라보는 건물이 있다. 행궁(화경전 권역은 엄밀히 말해 행궁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에서 유일하게 일제강점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건축물인 낙남헌이 있다. 정조는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제는 수원군청으로 사용했고 이후에 신풍초등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껏해야 큰 관아 정도로 생각했던 필자의 생각이 틀렸다. 낙남헌 뒤편에는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던 건물인 노래당(老來堂)이 있다. 행궁 전각의 건물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조가 희망했던 마스터플랜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화성행궁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미로한정
이제 봉수당을 다시 지나가 반대편의 부속건물이 몰려 있는 구역으로 넘어간다. 이 구역은 문화재라는 느낌보다는 드라마의 세트장 같은 인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장금>, <이산> 등 수많은 사극이나 영화들을 화성행궁에서 촬영했다.
브라운관에서만 보았던 광경들이 피부로 익숙하게 다가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봉수당에서 내전 방향으로 들어가면 혜경궁 홍씨가 거처하던 장락 궁이 나오고 역시 마네킹과 모형으로 그 당시 생활상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다.
고궁을 다니면서 왕도 왕이지만 궁궐에 살던 수많은 내시와 궁녀들은 어디서 지냈을까 하는 궁금함이 늘 있었다. 화성행궁에선 이런 호기심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장소가 재현되어 있다.
장락당 뒤편 회랑 3칸을 궁녀와 상궁 내시의 방으로 재현해 놓았다. 1칸도 채 되지 않는 고시원만 한 방에서 그들은 생활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점은 칭찬해 줄 만하다. 앞으로 남은 화성행궁의 건물들은 정말 복잡해서 마치 미로를 통과하는 듯하다.
유여택,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북군영 등을 통과하며 그 건물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 다녔다. 건물 곳곳에는 그 당시의 수라간이라던가 갑옷 등 병기류 심지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갇혔던 뒤주까지 우리가 궁금해했던 부분들을 모형이나 유물로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다. 2차 복원까지 완료되면 행궁은 예전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될 것이다. 앞으로 건물들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관권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화성 행궁의 뒤편으로 살며시 발걸음을 옮겨본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행궁의 규모에 지친 사람들은 맨 구석에 있는 후원 구역까지 좀처럼 가보질 않는다. 후원의 뒤편 언덕에는 미로한정이라 불리는 육각형 모양의 정자가 있다. 소박해 보이는 정자지만 이곳에 오르면 화성행궁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미로한정(未老閑亭)의 뜻은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未老得閑方是閑'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정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서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정조는 종종 이곳에 올라가 수원성이 번성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그려봤을 것이다. 가을에 미로한정에 오르면 단풍이 장관이라고 하니 그때를 기약하며 행궁과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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