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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목숨에 연연하면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

명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 역사상 혁명의 길에 나섰다가 단벌인 목숨을 잃은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허균이 추구한 혁명은 반군주ㆍ반주자학의 이중혁명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목숨을 담보한 도박이었다.

반군주는 곧 반역죄인데 여기서 군주를 둘러싸고 있는 사대부들까지 모두 토멸의 대상이었다면, 죽은 육신이라도 온전할 리 없었다.

"허균은 역적의 이름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는 민중들은 여전히 그의 옆을 떠나지 못했다. 아전 박충남이 장사지내기 위해서 허균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군사를 마구 때렸다. 박충남은 부장(部將)에게 고발당해 28일에 심문을 당했다." (주석 1)
  
 강릉 '초당마을숲' 허난설헌·허균 생가터
강릉 '초당마을숲' 허난설헌·허균 생가터 ⓒ 신한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반 나찌 레지스탕스 지도자 끌로드 모르강이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을 노래했지만, 조선사회에서 반체제 역적의 사지육신은 갈리고 찢겨진 채 저자에 널브러졌다. 이이첨의 무리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허균의 부친 허엽의 무덤까지 찾아가 부관참시하였다. 보복은 가열찼다. 

허균의 동지들은 두어 달 동안 90여 명이 잡혀 들어가 심문을 받았다. 몇 차례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한 자도 있었지만, 끝내 자백하지 않고 매 맞다가 죽은 자도 많았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허균의 종들도 형벌을 받았으며, 조카사위 의창군은 귀양가서 위리안치되었다. 조카들도 벼슬에서 떨려나 귀양갔다.

광해군의 난정을 뒤엎고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모두 누명을 벗었건만, 허균에게는 역적이라는 이름이 늘 붙어 다녔다. 성도 감춘 채, 균(筠)이라는 이름만으로 씌어왔다. 조선조 사회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그를 끝내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석 2)


율곡 이이는 정암 조광조를 평하여 "논의가 너무 날카롭고(論議太銳), 일하는데 점진성이 없었다 (作事無漸)"고 했다. 허균에게도 어느 정도 부합된다고 할까. 
  
 허균 생가가 옆에 있어 둘레길에 만들어 놓았다. 길동이가 마을 친구들과 노는 장면이다.
허균 생가가 옆에 있어 둘레길에 만들어 놓았다. 길동이가 마을 친구들과 노는 장면이다. ⓒ 김학섭
 
사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인 백암 박은식은 한말 갑신정변과 독립협회 등의 실패 원인을, 혁명이란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에 순응하여 바뀜에 점진성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선 단계가 있는 법인데 이를 무시하고 과격하게 손을 쓰다가 사면에 적을 만들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백암은 이어서 우리 민족성의 두 가지 병통으로 ①너무 겁을 먹고 유약해서 감히 산을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태도 즉 패배주의와 ②너무 조급하고 들떠서 하루아침에 해치우려는 태도 즉 모험주의를 들었다.(『한국통사』) 조광조와 허균의 사례도 이에 해당될 듯하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거울'에서 판별된다. 일회성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인물도 없지 않다.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는데도 죽은 후 오명ㆍ악명ㆍ악취를 씻지 못한 자들은 애꿎은 후손들에게 업으로 남는다. 반대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허균의 경우 그의 삶이 곧 그의 메시지이다. 줄곧 삶과 사의 울타리를 넘나들면서 치열하게 50년을 살았다. 죽음(임)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의 「사구부(思舊賦)」라는 시문에 나타난다. 

 고개 한번 쳐들고 숙이는 사이 예와 이제로세 
 가는 세월 이와 같음 보고서 
 이내몸 오래 가기 어려움 알았도다
 낮과 밤 어지러이 대사하니 
 교송의 장수 누릴 자 그 누군가 
 내 몸 매만지며 스스로 서러워라
 진정 영원히 소유할 내 것 아니로다 
 무슨 까닭에 험난을 무릅쓰고 명리 따르며
 미련한 탐부와 휩쓸려 함께 썩어가랴. (주석 3)


긴 세월이 흘렀다. 경기도 용인읍 원산면 맹리에 양천 허씨 일가 묘역이 조성되었다. 초당 허엽과 맏아들 허성ㆍ둘째아들 허봉 그리고 허균의 묘가 한 자리에 묻히게 된 것이다. 딸 허난설헌의 시비도 함께 자리한다.

초당 일가의 가족묘는 원래 서울 서초동 등에 흩어져 있어서, 죽어서도 이산가족의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도시개발과 함께 후손들이 수정산 기슭에 별도로 가족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그가 태어난 강릉시 사천의 애일당 옆 언덕에는 허균의 시비와 허난설헌의 묘소ㆍ시비가 있다. 

조선중세기 양반가의 머리 좋은 막내아들로 태어나 평탄한 삶을 팽개치고 역류의 길, 신분 해방과 이상국가건설을 시도했던, 호방한 자유인 이무기의 고난에 찬 노정을 찾는 작업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그가 진정 중세 봉건의식을 뛰어넘는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었느냐의 여부는 미제로 남긴다. 

허균이 남에 대해 쓴 글이지만 자신에게 되돌려줘도 손색이 없는 글이 있다. 조선시대 명필로 유명한 「한석봉의 제문」이다. 

 이름이 썩지 않으리니
 죽었다 하여 뭐 슬프랴만
 살아 있는 자들이
 부질없이 설워하네. (주석 4)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주석
1> 허경진, 『허균 평전』, 370쪽.
2> 앞의 책, 374쪽.
3> 이문규, 앞의 책, 362쪽.
4> 앞의 책, 36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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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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