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너무나 낭만적인 상상이었다. 시골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내가 만든 퇴비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손수 키운 벼로 밥을 짓고, 인생의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농촌의 빠듯한 살림살이를 모를 리 없는 내가 자발적으로 귀농을 하게 된 건, 이런 상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넘쳐났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도시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고향은 내 마음속에서 유토피아로 변해 있었다. 황량한 빌딩 숲을 가르며 출근할 때마다 새벽 안개를 잔뜩 묻힌 채 이리저리 흔들거리던 벼이삭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27세에 프로 골퍼가 되었다. 회원 번호는 212번. 나보다 먼저 여자 프로 골퍼가 된 사람이 211명이라는 뜻이다. 내가 선수로 나서기 시작했던 1990년대 후반은 지금과 달리 대회 수도 적었고 상금 규모도 작았다. 그 당시는 대회에서 순위가 10위권 밖이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골프 레슨과 대회 출전을 병행했고 나 역시 그러했다. 레슨이 많아지면 대회 준비를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 쓰느라 힘들었지만, 골프를 계속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사실 선수로서의 나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수상 경력이라고 해봐야 프로암(Pro-Am) 대회에서 우승 한 번 한 것이 전부니까. 소심한 성격 탓에 남을 가르치는 것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골프를 교육하는 일이라 의외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가르치고 대회에 나가고, 대회에 나가고 가르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가 언제부턴가 골프 연습장에서 레슨만 하고 있는 나이 먹은 나를 발견했다. 필드 위에 흐르는 시합의 팽팽한 긴장감과 투쟁심을 즐기던 나는 사라지고, 골프를 직장으로 여기는 내가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골프가 인생의 전부라고 여겼지만, 그것만이 내 삶은 아닌 듯했다. 내 안에는 연소되지 못한 삶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고, 그 에너지를 어딘가에 사용해야만 했다.
놀림과 의심
몰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마을의 가구 수는 3분의 1 정도로 줄어 있었고 가장 젊은 주민이 60대 초반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떠날 때 내 가슴에 새겨 둔 우리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인이 떠나버린 집들은 폐허로 변했고 주민들 사이의 분위기는 다소 삭막하기까지 했다.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였던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내가 만든 허상이었다.
홀로 농사를 짓고 계신 엄마를 만나러 명절에 가끔 들렀던 농촌과 내가 살아가야 하는 농촌은 많이 달랐다. 풍년이든 흉년이든 농산물의 가격은 언제나 바닥이라 주민들은 궁핍했고, 마을에 돈이 돌지 않으니 사소한 일에도 서로 악다구니를 퍼붓는 싸움이 벌어졌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백전면 오천리 음천마을은 함양군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촌락이다. 남원시 아영면과는 고갯마루 하나를 경계로 인접하고 지리산 뱀사골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마을 아낙네들의 고향이 대부분 남원이나 장수인 것도 다 그런 지리적 환경 때문이다.
지금이야 양파와 오미자 같은 작물들이 백전면에서 많이 재배되지만,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그런 것들은 없었다. 귀농해서 보니 우리 마을은 여전히 벼·밤·감·고추·감자 같은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양파는 트랙터가 있어야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고, 오미자 같은 특용작물은 정보력 있고 발 빠른 젊은 농부들이 선점했기 때문에, 우리 마을의 오래된 농부들은 예전부터 해오던 방식대로 농사를 지을 뿐이었다. 변화는 오래된 농부들을 피해 간 상황이었다.
나 역시 변화에는 둔감한 편이라서 어릴 적에 부모님을 도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벼·밤·고추·콩 같은 작물들을 재배했다. 사실 대다수의 귀농·귀촌인들이 그러하듯 집도 짓고 농사지을 땅과 1t 트럭을 사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통장의 잔고가 간당간당해지는 법이라 트랙터나 특용작물 시설물 같은 것들은 꿈도 못 꾸게 되는 게 현실이다.
처음에 나와 남편은 조류의 배설물로 만든 구아노 퇴비 이외에는 우리가 기르는 모든 작물에 농약과 비료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닐 멀칭(농작물을 재배할 때 경지토양의 표면을 덮어주는 일) 대신 짚으로 두둑과 고랑을 덮어줬다. 우리가 탐독한 니어링 부부(Scott Nearing, Helen Nearing)의 책들에 영향을 받아서 그게 인간과 땅을 위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편은 논밭을 갈고 김을 매는 경운 작업도 삽 하나로 해결했는데, 주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놈으로 놀리기에 딱 좋은 행동이었다. 나도 남편의 행동이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고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고생 좀 하다 보면 저러다 말겠지 싶어서 그냥 내버려 뒀다.
그런 것들보다 문제는 우리가 농약과 비료 없이 농사를 지었는데도 아무도 그걸 믿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기농 인증은 절차 때문에 시간이 꽤 걸리는 과정이라, 우리가 생산한 작물이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는 오직 우리의 진술뿐이었다.
친한 친구에게 농약과 비료 없이 생산한 고춧가루라고 선물을 줬는데 그녀는 반신반의했다. 그 친구는 어떻게 농약 없이 고추를 키울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재배 면적 대비 생산량은 좀 적지만, 두둑(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언덕)의 높이를 많이 올려서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말해도 결국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선물이라고 했는데도 내 통장에 고춧가루 가격의 다섯 배가 넘는 돈을 송금했다. 돈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참으로 서글펐다.
내 인생에 획기적인 한 해
타인에게 밤과 두릅만 팔고 벼·고추·콩 같은 것들은 그냥 내가 먹을 정도만 농사짓자고 다짐했다. 그게 귀농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다. 두릅은 농약이나 비료 없이도 알아서 적당히 자라고, 밤은 함양군에서 1년에 한 번 항공 방제를 하고 있으니 내가 세운 기준과 적당히 타협한 셈이었다. 내 마음에 새긴 농사의 기준이란 농약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함양군에서 실시하는 항공 방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나에게 면죄부를 준 꼴이다.
아무튼 2017년 귀농 3년 차부터 두릅과 밤농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그해는 그래도 경제적으로 그럭저럭 버틸 정도는 됐다. 매달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농사 외 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두릅과 밤은 노동집약적인 가족농 혹은 소농의 작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력을 투입해서 농사가 끝난 뒤 결산을 해보면 거의 가족의 인건비만 남는다. 출하한 밤과 두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몸을 갈아 넣은 노동의 대가만 있는 수입·지출표를 보고 있노라면 허무함과 허탈함이 밀려온다.
2017년 농사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밤으로 육백만 원, 두릅으로 사백만 원, 합쳐서 대략 1000만 원이었다. 농사 외 수입이 없었다면 세 식구가 입에 풀칠도 할 수 없는 금액이라 할 수 있다(실제로 입에 풀칠만 하는 농가가 허다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귀농해서 농사를 몇 년 짓다가 포기하고 읍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출퇴근하는 주민들도 꽤 있다.
귀농 5년 차였던 2019년은 내 인생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한 해였다. 회계 결산상으로 가장 절망적이었고, 인간과 삶에 대한 관점이 바뀐 2019년이었다. 그해 내가 관리하던 두릅은 전염병으로 거의 절멸해 버렸고 이상 기후로 밤꽃은 제대로 피지도 못했다.
두릅으론 백만 원도 벌지 못했고, 한 달 넘게 산을 돌아다니며 농협에 밤을 출하한 결과는 삼백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농사 준비에 내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았다면 인과응보라고 여기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책과 인터넷으로 두릅에 관해 공부하며 전지(곁가지 따위를 자르고 다듬는 일)를 열심히 했고, 틈만 나면 밤나무 주변을 예초기로 관리하며 비료도 적당히 줬다. 사실상 초봄부터 준비를 가장 열심히 한 해가 2019년이었지만 농사 결과는 비참했다.
그때까지 나는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프로 골퍼가 됐다고 생각했다. 내 논리를 대입하면 프로가 되지 못한 내 주변의 친구들은 게으른 사람이다. 하지만 2019년을 통과하며 그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열심히 한 결과로 프로가 된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다. 나와 함께 프로 테스트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노력했을 테지만 운이 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인류의 공동 작품인 이상 기후로 인한 소득의 감소는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마을의 오래된 농부들은 육체와 정신의 쇠약을 버틸 수 없어서 자신들의 논밭을 대형 농기계를 소유한 대농들에게 넘긴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부업 정도로만 여기던 밤농사가 그들의 주 소득원이 됐다. 상황은 그러했고 밤꽃의 개화기 때 빗줄기는 끈질기게 쏟아졌다. 마을 주민들이 어떤 방법으로 무슨 수로 이상 기후와 투쟁할 수 있겠는가?
2019년 겨울과 2020년 봄은 우리 마을 최악의 시기였다. 거세게 불어닥친 경제적 위기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마을 구성원들의 정서적 공동체성마저 쉽게 허물어 버렸다. 주민들의 의식 아래 있던 해묵은 갈등이 매일 새로운 형태의 분쟁으로 드러나고, 원주민들과 귀농·귀촌인들의 대립도 말과 행동으로 직접 표출되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산산조각으로 깨질 찰나였다. 다들 그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지만 싸움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밤새가 울어대는 2020년 늦은 봄, 마을 회관에 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이 모였다. 마을의 최고령자도 있었고, 아무런 연고 없이 귀농한 분도 있었다. 2019년의 밤 생산량 감소와 그로 인한 소득 저하를 2020년에는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마련된 자리였다. 그날 밤 마을에서 처음으로 주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려는 단체가 생겼다. 그 단체의 이름은 '지리산의식주연구회'였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노일영 기자는 프로 골퍼로 KLPGA 정회원입니다. 현재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이사장과 마을기업 대표, 함양군 백전면 음천마을 이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주간 함양>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