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은 성장기에 남다른 바가 많았다.
당시 아동들처럼 전통적인 한학을 배우면서도 시국(사회)에 관심을 보였다.
"188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고향과 가까운 보은 등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자 예관은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숙(同塾)의 학우들과 「동년군(同年軍)」을 조직하여 무덕을 제창하면서 항일의식을 키웠다." (주석 1)
15세 소년에게 역사의식 나아가서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한 것은 동학혁명이었다. 특히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청주성과 관련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인근 지역이라 소식을 훤히 들었을 터이다.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이 청주성을 공격한 것은 11월 13일 새벽이다. 남원을 출발할 때 8천 명이던 김개남의 부대는 전주성을 거쳐 청주성까지 오는 도중에서 계속 농민군이 합류하여 2만 명에 이르렀고, 회덕과 문의 일대에 남아 지역을 방비하던 북접 동학농민군도 합세하여 최소 2만 5천 명에 달하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김개남은 강사원ㆍ안귀복ㆍ이수희 등을 앞장서게 하여 청주성 공격에 나섰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강력한 일본군의 화력과 작전 역량 때문에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패배한 것이다. 김개남은 일본군이 청주성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일본군과 조선군 교도중대는 순무영의 첩보를 접하였지만 그보다는 우금치전투 상황이 급선무라고 보고 그쪽으로 향하기로 결정하여 움직여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농민군이 청주성을 공격하기 전날인 11월 12일(양 12.8)에 청주성에 일본군 1개소대 병력이 들어왔다. 이들은 일본군 군로실측대의 호위 임무를 맡은 후비보병 제19대대 소속 1개소대 병력으로, 구와하라 에이지로 소위의 지휘하에 그 전날(11. 11) 문의에서 일군의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치르고 대규모 농민군이 청주성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포착, 한 발 앞서서 청주성으로 들어온 것이다. (주석 2)
소년은 우리 편(동학군)이 청주성을 빼앗지 못하고 일본군에 점령된 것에 분개하고 친구들과 '동년군'을 결성하여 훈련을 하는 등 항일의식을 키웠다. 그럴 즈음(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공사관 수비대ㆍ낭인들에게 살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 이 사건 역시 젊은 신규식에게는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선생은 왜구를 배척하라는 격문과 사악함을 반박하는 글들을 지으시고,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워서 왜구를 철저히 배척하기 이르렀다. 그런 한편, 같이 학문을 배운 벗들과 더불어 동년군(同年軍)을 조직하여 밤낮으로 조련하며 힘을 기를 것을 제창했다. 후에 간교한 도적 무리들이 정찰하여 당국에 밀고함으로 선생이 여러 번 체포되었지만 끝내 굽히지 않으셨다. (주석 3)
소년 신규식의 생애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1894년부터 시작된 갑오개혁(갑오경장)이다. 일본군은 동학농민혁명 진압을 명분으로 들어왔다가 전주화약 후 주둔할 구실이 없어지자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을 압박했다. 이에 정부는 자체적인 개혁에 나선 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은, 관제를 개혁하여 왕실과 국정을 분리하고 국왕의 인사ㆍ재정ㆍ군사권을 축소했다. 또 과거폐지, 신분을 가리지 않는 인재등용, 사법권의 독립, 연좌제 폐지, 은본위제로 화폐제도 정비, 도량형 통일, 조세의 금납화, 노비제도의 폐지와 인신 매매 금지, 과부의 재혼 자유, 남녀 조혼 금지, 중앙 정부 기구와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유교 본위의 교육을 대신할 근대적 학교 제도의 실시 등이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의 내용 중에는 신분 타파와 과부의 재혼처럼 동학군의 요구 사항과 일치하고 있는 부분도 있으나, 동학군의 요구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던 토지의 분배는 전혀 논의되지 않는 등 봉건 지주를 비롯한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조선 양반가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과거제가 폐지되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신규식도 다르지 않았다.
17세가 된 1896년 봄 향리에서 경기도 명문가인 한양조씨 규수 조정완(趙貞完)과 혼인하였다. 장인은 군수를 지낸 조종만(趙鍾萬)이었다. 신부는 남편이 혼인한 후 3개월 만에 신학문을 공부하고자 서울로 떠나고, 얼마 뒤 중국으로 망명함으로써 길고 긴 별거의 세월을 홀로 살아야 했다.
당시 선비들은 아내에 관해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를 미덕처럼 여기는 풍조였다. 그래서였을까, 신규식의 부인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민석린이 지은 책에 「신공(申公) 부인 조정완 여사 유상(遺像)」이란 글과 사진이 남아 있다. 글의 앞 부문이다.
부인 조씨는 경기(京畿)의 명문가 규수이다. 시운이 좋지 않은 때에 태어났으니 바로 나라가 다난했던 가을이었다. 결혼 후 겨우 삼 개월 만에 부군은 집을 떠나 서울로 가서 국사(國事)로 분주했다. 오래지 않아 일본인에 의해 한국 군대가 해산되자, 부군은 의분이 차올라 의병을 조직하여 수개월 동안 생사를 넘나들고 위험을 무릅쓰며 분투하였고, 불행히도 의병 일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부인은 고향에서 고생을 참고 견디며 십 수 년 동안 외롭고 가난한 생활을 보내다가, 서기 1919년 장녀가 출가한다는 명목을 빌려 비밀리에 상해로 건너가서 비로소 부군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연이어 삼 년 동안 경제적인 곤란으로 온갖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원망의 말이 없이 오히려 평상시처럼 태연자약하게 처신하였다. 평상시의 부인을 종합하여 보자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온화하고 친절하여 신공(申公)의 혁명사업에 도움이 적지 않았으니, 진실로 혁명가의 현처(賢妻)로서 손색이 없었다. (주석 4)
주석
1> 신승하, 「예관 신규식」, 『독립운동가 열전(4)』, 53쪽, 한국일보사, 1989.
2> 김삼웅, 『개남, 새 세상을 열다』, 276~277쪽, 모시는 사람들, 2020.
3> 민필호, 『예관 신규식 선생 전기』, 『전집(1)』, 302쪽.
4> 앞의 책, 40~4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