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국권의 박탈이었다.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기관은 모두 폐지되었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교관들도 모두 본국으로 철수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마치 점령군사령관처럼 군림하며 행세하였다.
을사늑약에 찬성한 대신은 이완용ㆍ이근택ㆍ이지용ㆍ민영기ㆍ권중현이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의기 있는 지사들이 오적의 처단에 나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나인영과 오기호 등이다. 이들은 자신회(自新會)를 통해 회원과 장사들을 모집하고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신규식은 만민공동회 시절에 나인영(나철)을 만나 그의 우국충정에 크게 감복하고 동지가 되었다. 그가 19세의 연상이지만 나이를 뛰어넘어 뜻을 같이 할 수 있었다. 뒷날 나인영이 나철로 개명하고 단군교를 대종교로 중광(重光)할 때 신규식이 가장 먼저 입교하는 등 두 사람은 민족사연구와 독립운동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나인영이 을사오적 처단을 준비하는 과정에 신규식이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기에 상당한 비용을 댓을 것이다. 다만 군인 장교의 신분이어서 앞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나인영은 을사오적 처단을 지원한 의사들에게 '격려사'와 함께 「간신을 목 베는 글」을 발표하였다.
간신을 목 베는 글
이완용 - 러시아, 일본에 붙어서 조약 체결의 선두를 섰으니 꼭 죽여야 함.
권중현 - 이미 조약 체결을 인정했고 농부(農部)의 일국(一局)을 외인에게 양보했으니 꼭 죽여야 함.
이하영 - 조약 체결이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도 속으로는 옳다 하고 겉으로는 그르다 하여 백성을 속였으니 꼭 죽여야 함.
민영기 - 조약 체결이 안으로는 옳고 밖으로는 그르다 하여 전국 재정을 모두 외인에게 주어버렸으니 꼭 죽여야 함. 이지용 - 갑신년의 의정서와 을사년의 신조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고 매관매직하여 나라를 망치게 했으니 꼭 죽여야 함.
박제순 - 외부대신으로 조약을 맺어 나라를 팔고 또 참정대신으로 정권을 양도했으니 꼭 죽여야 함.
이근택 - 이미 조약 체결을 허락하고 공을 세운다 하여 폐하를 위협하고 백성들에게 독을 뿌렸으니 꼭 죽여야 함. (주석 4)
나인영이 주도한 을사오적 척살거사(1907년 3월 25일 오적을 습격했으나)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훈련 미숙과 준비한 무기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2년 뒤인 1909년 12월 이재명이 다시 이완용을 습격했으나 상처만 입힌 채 죽이지는 못하고 이듬해 그가 사형 당하였다.
을사오적을 조종하고 대한제국을 무너뜨린 국적 제1호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3월 2일 군함 이즈미(和泉) 편으로 인천을 통해 서울에 와서 정식으로 조선통감에 착임하였다. 이때의 수행자는 육군소장 무라다, 해군소장 미야오카, 통감부 초대 외무총장인 나베시마, 비서관 후류야와 촉탁인 남작 다까자끼ㆍ나베시마ㆍ도모도, 흑룡회의 우찌다 등이다. 또 이토의 부임 행렬 중에는 도쿄 니혼바시의 요릿집 오마다의 딸 오카네와 간호부 겸 정부인 오류와 비파의 명인 요시다 다께꼬 등 3명의 여성도 끼어 있었다.
이토는 1909년 6월 13일까지 4년여 동안 조선을 통치하였다. 이 기간 이토는 제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부리면서 일제의 조선통치 기틀을 만들었다. 의병 학살과 각종 이권ㆍ문화재ㆍ토지수탈 등 온갖 만행이 이토의 지휘 아래 자행되었다.
이토는 남산 왜성대의 총독관저와 정동 손탁호텔에서 양녀 배정자를 껴안고 지내면서 친일세력을 조종하고 일본군의 위력을 배경으로 조선의 식민지배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이토의 술책과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명칭을 고쳐 그곳에 고종황제를 유폐하고, 순종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창덕궁에 안치시켰다. 또 고종황제가 귀여워 한 왕자 은(垠)을 일본으로 인질로 끌어가고, 이토 자신이 왕자의 교육을 맡은 이른바 보육총재(輔育總裁)를 맡았다. 결국 그는 1909년 10월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처단되었다.
주석
4> 김삼웅, 앞의 책, 10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