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1905)에서 경술병탄(1910년)에 이르는 5년은 조선으로서는 그야말로 국망지추(國亡之秋)의 계절이었다. 우국지사들이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면서 순국ㆍ순절자가 뒤를 잇고 곳곳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이한응(1874~1905), 민영환(1861~1905), 조병세(1827~1905), 박승환(1869~1907), 이준(1859~1907), 홍범식(1871~1910), 황현(1855~1910) 지사가 각각 을사늑약과 경술조약에 반대ㆍ비판하면서 자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외교권에 이어 조선의 법률 제정과 관리 임명권이 속속 일제의 손아귀로 넘어가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제2차 의병전쟁으로 원주의 원용팔, 죽산ㆍ안성의 박석여, 여주의 이범주, 경상도의 이유인ㆍ이하현ㆍ정용기ㆍ신돌석, 전라도의 기우만ㆍ양한규ㆍ고광순ㆍ김동신, 충청도의 노병대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다.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던 의병들은 1908년 1월(양력)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서 모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유학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인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임을 선언하고, 정의와 윤리의 적인 일본군의 토멸을 선언했다.
'13도 창의군'은 서울을 탈환하고자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고 그중 일부는 세검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의병 선봉 부대를 기습하면서 '13도 창의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우리 의병은 일본군의 최신 병기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신규식은 두 차례나 순절의 시도에서 실패하고 그때 마셨던 독약으로 눈을 다쳐 의병에 나서지도 못하였다. 자신의 부하들이 각지에서 의병전쟁을 일으킬 때도 그는 하릴없이 지켜볼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군의 상사이던 윤치성이 찾아왔다. 해산된 군인들의 퇴직금을 모아 실업회사를 차려 군자금을 마련하자는 제안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로서는 다시 한번 파격적인 행보였다. 곧 회사를 차리고 알찬 경영으로 성과를 내게 되었다.
윤치성과 예관은 동분서주해서 10여 명의 퇴직장교를 규합해서 광업주식회사(鑛業을 했다는 기록은 잘못임)를 발기했다. 발기인은 윤치성ㆍ조철희ㆍ신창휴ㆍ민대식 그리고 예관 등 10여 명이었다. 사무실 위치는 현 단성사 앞이었고, 업종은 지방과의 각종 물산을 무역하는 것이었다. 사장은 이 회사에 상당한 출자를 한 윤치소(尹致昭)였고, 예관은 경리 책임자가 되었다.
회사는 나날이 번창하여 갔다. 한편 분원 자기공장을 단독으로 설립하여 고려자기의 부활에도 힘썼다. 또 예관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도 가입하여 민권운동에도 열렬히 참여했다. 광업회사의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예관은 잠시도 쉬지 않고 뛰었다. (주석 1)
그는 1908년 7월 애국계몽운동단체 대한협회(大韓協會)에 참여한다. 대한자강회가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뒤 새로 조직된 계몽운동단체였다. 강령에서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 폐습의 교정, 근면저축의 실행과 권리ㆍ의무ㆍ책임ㆍ복종의 사상을 고취"라는 7개 항목을 내걸었다.
사무소는 서울 탑동에 있었고 회원은 5천여 명, 지방에 39개 지회를 두었다. 남궁억 회장, 오세창 부회장, 총무 윤효정, 신규식은 장지연ㆍ유근ㆍ정교ㆍ이종일 등 당대의 명사 23명과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일종의 이사 또는 대의원격이다. 부서로는 교육ㆍ법률ㆍ재무ㆍ실업ㆍ지방부를 두고, 월보간행과 인권옹호, 국민계몽의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신규식은 실업부 부원으로 임명되었다.
대한협회는 창립당시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항일운동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일진회와 제휴를 모색하는 등 점차 그 성격이 변하였다. 그러자 그는 지체없이 대한협회의 발길을 끊었다. 탈퇴한 것이다.
주석
1> 이이화, 앞의 책, 24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