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에 나선 사당리 사람들
사당동 출신 독립운동가는 없을까? 삼일공원에서 독립운동 이야기를 한 마당에 사당동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당동 출신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이는 없다. 그렇다고 사당동이 독립운동의 불모지대였다거나 사당동과 인연이 있는 독립운동가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선 사당 사람들 중에도 동작동과 마찬가지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있었다. 1907년 4월 16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과천군 상북면 사당리 사람 장두환과 김창형이 각 6원, 합 12원을 낸 사실이 확인된다. 비록 옆 동네 동작리 사람들처럼 다수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금액으로 보면 2명이 동작리 사람 65명이 낸 금액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재유 그룹의 송유근, '광산촌' 사당리의 관흥광산에서 검거되다
일제 강점기 사당리에는 텅스텐 광산이 여럿 있었다. 과천으로 넘어가는 방향에 있던 승운광산(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상도리 방향의 관흥광산(이원재), 동작리 방향의 경남광산(장기방)이 그들이다.
이중 관흥광산에서 1938년 5월 24일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경의 수배를 받던 독립운동가 송유근(1916~?)이 영등포경찰서 고등계형사에게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황해도 봉산 출신의 송유근은 전설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이재유의 경성준비 그룹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의 추적을 피해 관흥광산에 숨어들어 폭약발파계에서 인부(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송유근은 중앙고보 2학년에 다니던 1933년 11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한 이력도 가지고 있었다.
만주와 중경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현정경의 아들은
독립운동가 현정경(1881~1941)이 1992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당시 현정경의 아들 현태균(당시 78세)는 사당1동에 살고 있었다. 태균에게 아버지 현정경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아버지 현정경이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92년 8.15 광복절을 앞두고 마침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는 "좌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던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음으로써 반쪽 역사가 온전히 회복돼 가는 것 같아 기쁠 따름"이라는 손자 종오(당시 36세)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평북 박천 출신의 현정경은 1912년 만주로 망명해 항일단체인 한족회에 가입하고 서로군정서에서 조선독립단원이 돼 민족독립사상 고취와 무장투쟁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까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1922년에 만주 독립운동의 통합 단체인 통의부(중앙집행위원장 김동삼)에서 법무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정의부가 창립됐을 때는 중앙집행위원 겸 민사위원장으로, 양기탁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당을 결성할 당시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조선혁명당의 집행위원장 겸 비서부위원장을 맡아 현익철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이끈 지도자였다.
이후 활동무대를 중국 내륙으로 옮긴 현정경은 1937년 일제의 중국 대륙침략이 시작된 직후 김성숙·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중경에서 조직해 주석으로 추대됐다. 이 단체는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발전했다.
1940년 지장에서 열린 독립운동단체 연합회의 석상에서 각 단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총결집해야 함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던 현정경은 1941년 5월 10일 병을 얻어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광복군의 김용주, 해방 이후 사당동에 살다
한국광복군 출신의 김용주(1912~1985)는 해방 이후 사당1동에 살았던 인물이다.
황해도 신천 출신의 김용주는 1938년 중국으로 망명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한청반을 수료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졌을 때 제2지대 총무조원 겸 공작조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0년 홍아사진관의 사진사로 일하게 되면서 사진사 자격으로 일본군 병사(兵舍)를 출입할 수 있는 문감(출입증)을 발급받아 자유로이 정보를 수집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활동을 과감히 벌였다고 한다.
1942년 3월 대원의 불화로 인한 5지대장 나월환의 암살사건에 연루돼 2년 도형을 받는 등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는데, 사면돼 출옥한 후에는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들어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다. 훈련 과정을 마치고 국내 정진군 함경도반 반장에 임명된 김용주는 국내진입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국내진공작전이 성사됐다면 해방 정국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김용주가 1985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별세할 때에는 방배동에 살고 있었다. 사당동에서 어느 시점에 방배동으로 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동에서 돌아가신 독립유공자 박팽동과 주흥서
전남 담양 출신의 박팽동(1905~1990)은 사당4동 제일아파트에 거주하던 중 별세하였다.
1930년 <동아일보> 왜관지국장을 할 당시 광주학생운동 관련 구속 인사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에 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대에 뒤늦게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조선선교회 담양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했는데, 1940년 8월경부터 교리에 어긋나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일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설교를 했다.
"일제의 동방궁성요배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이를 거부해야 한다"는 선교활동을 하다가 결국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8월 1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신궁불경죄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같은 일자로 다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모두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78년 <경향신문>은 사당2동 산15번지 자택에 살던 독립운동가 주흥서(1925~1978)의 별세 소식을 전한다.
함남 북청 출신인 주흥서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식량과 자원을 강제 수탈하고 징용·징병 등의 각종 명목으로 한국인을 침략전쟁의 일선으로 끌고 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주흥서는 1942년 6월 10대의 어린 나이에도 동포학생들을 규합하여 항일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첫 옥고를 치른다. 그 후 1944년 2월 음력 정월 대보름날 함남 북청에서 놀이터에 모인 청년남녀 300여 명에게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역설하다가 또다시 일경에 붙잡히고 만다. 이일로 같은 해 5월 이른바 '보안법 및 육해공군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2년-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아버지 큰사전 다 됐습니다!"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한징(1886~1944)의 무덤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그런데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기 전 한징의 무덤은 1992년까지 시흥군 신동면 사당리(현 사당동)에 있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한 언론에는 "아버지 큰사전 다 됐습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등장한다. 이 기사는 "시흥군 신동면 사당리 '강금봉' 서쪽 기슭의 한 묘 앞에서는 우리말 큰사전 한질(6권)을 쌓아놓고 흐느껴 우는 청년이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흥군 신동면 사당리는 지금의 사당동을 가리킨다. 사당 일대가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됐으니 1957년에는 아직 경기도 시흥 땅이었다. 우리말 큰사전 한질을 쌓아놓고 우는 청년은 한징의 외아들 한무영이었고, 무덤의 주인은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한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 한징이었다.
한징은 1922년부터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한 언론인이기도 했는데, 1929년에는 이극로,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편찬회 편찬원으로 활동했다. 한징은 이후 1931년에 만들어진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이 됐다. 그러다가 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한징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2월 함흥감옥에서 옥사하고 만다. 동지 이윤재가 옥사한 지 석 달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징의 외아들 한무영은 한징이 옥사할 당시 열아홉 살로 경신중학교 5학년생이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일제에 의해 감시를 당했을 한무영이 아버지의 평생의 업이기도 했던 우리말 큰사전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3년 8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돼 묘소에 바칠 수 있게 됐으니 그 감격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한무영이 아버지 묘에 바친 이 큰사전은 전체가 여섯 권으로 돼 있었는데, 워낙 방대한 규모이다 보니 첫째 권은 해방 이후인 1947년 10월 9일에 나왔다. 하지만, 마지막 여섯째 권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957년 10월 9일에나 가능했다. 전체 16만4125어휘를 3804면에 우리말로 뜻풀이 해놓은 방대한 분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