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비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특별한 한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무조건 맞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엄마의 레시피는 나에게 오로지 하나뿐인 레시피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일흔 살 밥상을 차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엄마의 음식과 음식 이야기를 기록한다. [기자말] |
내가 어린 시절, 엄마는 휴일이면 가끔 국수를 만들어주셨다.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국수를 삶은 뒤 면발에 육수, 달걀지단, 잘게 썬 김치, 볶은 호박나물, 김가루 등을 정성스레 얹어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국수 삶기의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국수가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국수가 끓는 물에서 팔팔 끓을 때, 찬물을 한 그릇 붓는 이유도 국수 면발을 쫄깃하게 삶기 위해서다. 잘 삶아진 국수 면발을 소쿠리에 건지자마자, 찬물로 바쁘게 헹구는 것도 국수의 탄력을 탱탱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헹군 면발을 마치 쪽을 지듯 얌전히 말아서 채반에 가지런히 놓는 것도 국수 면발이 흐트러져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먹기 직전까지, 국수 면발의 식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초집중해야 하는 이 숨 가쁜 시간들. 국수를 삶아본 사람은 안다. 단 몇 초 사이로 행여 국수가 퍼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는 것을.
국수를 좋아하셨던 엄마의 이모할머니
엄마는 언젠가부터 국수를 먹을 때면, 꼭 엄마의 이모할머니 이야기를 하신다. 아마도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였을 것이다. 이모할머니라고는 해도 엄마에게는 친정엄마나 마찬가지인 분이다. 엄마는 다섯 살 때, 엄마를 여의었다. 같은 동네에 사시던 이모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 이모할머니는 국수를 무척 좋아하셨단다.
"엄마는 국수 보면 이모할머니 생각 나. 이모할머니가 엄마한테 늘 말씀하셨거든. 나중에 자기는 국수 한 그릇이면 된다고. 나중에 자기가 집 놀러오면, 뭐 이것저것 음식 준비할 필요 없이, 그냥 국수 한 그릇만 주면 된다고 하셨어."
아무리 친정 식구들이라고는 하나, 직장 다니며 고만고만한 세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 오랜만에 오신 고향 어르신들 상차림 준비하는 것도 부담이 될 거라는 것을 이모할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리 '국수 한 그릇이면 된다'고 못 박으셨던 것이다.
"이모할머니는 푹 퍼진 국수를 좋아하셨어. 정말 푹~ 퍼진 국수. 국수 삶으면 그냥 손가락으로 집어서 드실 정도로 좋아하셨지."
"... 그런데 왜 이모할머니는 퍼진 국수를 좋아하셨어요? 사람들은 대개 퍼진 국수 안 좋아하시는데."
내가 묻자, 엄마는 잠시 생각하시는 듯했다.
"글쎄다..."
"엄마, 혹시 이런 거 아닐까? 이모할머니가 젊은 시절에 식구들 국수 다 만든 뒤에 나중에 당신이 먹으려고 보니까 국수가 다 퍼져있었던 거지. 그런데 그걸 드시다 보니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좋아하시게 된 거 아닐까?"
"글쎄... 모르겠구나."
내 그럴듯한(?) 추리에도 엄마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물어보질 않았네. 왜 퍼진 국수를 좋아하시는지."
"... 궁금하네 엄마. 한번 물어보시지 그랬어요? 왜 퍼진 국수 좋아하냐고."
"... 그러게 말이다. 국수를 그렇게나 좋아하셨는데... 한 번도 만들어드리지도 못하고..."
엄마의 이모할머니 국수 이야기는 늘 이렇듯 회한으로 끝난다. 이모할머니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국수를 한 번도 대접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엄마의 가슴에 늘 죄책감과 후회로 남아있다. 비빔국수를 유난히 좋아했다는 이모할머니. 국수 한 그릇 만드는 게 그리 어렵고 힘든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내 기억에 이모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던 기억은 거의 없다. 친할머니가 우리집에 자주 오셨던 것에 비하면 이모할머니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까 말까다. 정말 어쩌다 집에 오셨어도 이모할머니는 가만히 쉬는 법이 없었다.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며 집 청소며 빨래 개기, 저녁식사 준비, 우리들 도시락 설거지 하기에 바쁘셨다. 그리고는 엄마가 오기 전, 우리들을 불러놓고 당부하셨다.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알았지?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돼. 알았지?"
이모할머니는 저녁밥만 잡숫고 일찍 주무셨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딸이랑 긴긴 수다를 떨 법도 하건만, 마치 이 집에 자취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듯 그렇게 조용히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다. 다음날 엄마가 출근하기 전, 일찌감치 집을 나선 이모할머니. 그랬다. 엄마로서도 국수를 만들어드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인생, 국수 퍼지는 시간보다 더 짧은 걸까
엄마가 만들어준 오징어숙주국수볶음은 물국수도 비빔국수도 아니다. 약 10년 전 엄마가 우연히 잡지를 보고 시험 삼아 만들어본 음식인데, 그때 먹어본 나는 그 맛을 잊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만들어달라고 내가 이야기할 때마다 엄마는 '네가 그때 무척 배가 고파서 그게 맛있었나 보다'라며 웃고 넘어가셨다.
오징어숙주국수볶음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일단 국수를 삶는다. 삶은 국수는 물기를 뺀 뒤 참기름과 간장으로 살짝 비벼놓는다. 면이 퍼지지 않기 위한 일종의 코팅이다. 그다음 뜨거운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인 뒤 마늘채와 양파를 넣고 볶는다. 여기에 간장을 넣은 뒤 손질한 오징어와 숙주를 볶는다. 오징어가 붉은색으로 변하고 숙주의 숨이 죽을 때쯤, 불을 끈다. 국수 위에 볶은 것들을 끼얹어서 잘게 썬 청양고추를 함께 넣어서 잘 비벼 먹으면 된다.
이모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만들다 보니 국수가 그만 퍼져버렸다. 퍼져버린 국수쯤이야 다시 삶아 먹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가버린 사람은 다시 올 수 없는 법. 엄마와 나는 오징어국수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이모할머니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예전에 나는 이모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면 왜 그렇게 빨리 당신 집으로 돌아가셨던 걸까, 궁금했다. 그 당시엔 우리 집이 그냥 불편했던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이제는 당신께서 좋아하는 푹 퍼진 국수 천천히 드시며 엄마랑 이야기 나누시면 좋으련만. 삶이란 때로 국수 퍼지는 시간보다 더 짧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