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17일 오전 11시 15분]
국제사회가 벨라루스 정부에 공분했다. 지난 5월 23일, 벨라루스 정부가 야권 활동가를 체포하기 위해 전투기로 외국 여객기(라이언에어)를 강제착륙시켰기 때문이다. 벨라루스 당국은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 하마스의 폭탄테러 제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으나, 폭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벨라루스의 유력한 야권 활동가이자 언론인인 로만 프라타세비치(26)와 그의 애인 소피아 사페가(23)가 체포됐다.
국제사회는 이 민항기 납치 사건을 "국가가 주도한 테러행위"라면서 강력 비판했다. 당시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들은 다음날(5월 24일) 만장일치로 벨라루스 항공사의 EU 영공비행 및 공항 사용 금지를 합의하는 등 강경한 제재조치를 추가했다. 유럽의회는 지난 10일(현지시각) 이와 관련해 유럽연합(EU)이 조속히 추가 제재를 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 네덜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체코 등 유럽 각국에서 벨라루스 정부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을 비판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대선 부정' 논란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운 벨라루스
10개월 전 대선 부정 논란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벨라루스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과 그 정권이 초강경 폭력 진압으로 대응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비판을 받아왔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1994년 이래 27년간 장기집권해오는 가운데, 공공연한 히틀러 추종 발언, 코로나19 부정, 여성혐오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장기간 독재의 심각한 인권탄압으로 수많은 벨라루스 야권 활동가들은 납치 및 행방불명됐거나, 국외 망명 중이다.
최근 벨라루스에서는 시민들을 향한 공권력의 폭력을 합법화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인권위기가 악화될 우려를 낳고 있다. 루카셴코는 5월 17일 경찰이 시위대 진압에 무기사용을 허용하는 법에 서명했다. 합법적인 경우라고 여겨질 때, 경찰이 물리적 공격, 무기, 전투용 특별장비를 사용해 집회 참가자들에게 상해를 가해도 면책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안은 6월 19일부터 효력이 발휘된다.
'벨라루스 내 고문에 관한 국제조사위원회'의 세르게이 우스티노프 공동창립자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선거이래 5000명 이상이 고문 피해를 봤고, 최소 5명 시민이 사망했고, 3만7000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5000명 이상 고문 피해'... 벨라루스의 참상
벨라루스의 대표적 인권단체인 비아스나인권센터에 의하면, 6월 15일 현재 벨라루스의 정치범은 총 493명으로, 지난 3월 285명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 8월 부정 대선 이후 루카셴코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해온 시민들의 집회는 규모와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지만 현 정권의 야권인사, 언론탄압은 오히려 강도와 수위가 훨씬 높아졌다. 벨라루스의 최대 독립 매체인 'TUT.BY'를 강제 폐쇄했고, 4월에는 매스미디어법 개정을 통해 언론인의 정부 비판을 불법화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루카셴코와 측근은 이미 서방국가들로부터 입국 금지, 자금동결 등 제재조치를 받았지만, 최근 유럽의 정계와 언론에서는 추가 제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벨라루스에 민주적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30억 유로에 해당하는 EU 투자 프로그램을 유예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다수 언론도 '벨라루스 정부에 대금 지급 차단'을 역설하고 있다.
세르게이 우스티노프 공동창립자 또한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벨라루스인들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위해 칼륨비료회사 벨라루스칼리(Belaruskali), 화학회사 그로드노아조트(GrodnoAzot), 기계류 회사 마즈(MAZ) 등 국영기업들과의 무역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비즈니스는 "자국민에게 대대적인 고문과 탄압을 가하는 안보 세력에 크게 투자하고 있는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도 벨라루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벨라루스 주재 일본대사 토쿠나가 히로키는 민주열사 알렉산더 타라이코브스키의 사망지점에 추모의 꽃을 헌사하기도 했고, 일본 외무성은 몇 차례 공식 비판 성명을 내기도 했다. 현재 벨라루스는 지난 대선 결과를 유럽연합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동맹국 러시아의 지원에만 의존하고 있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돼 있다.
한국 내 벨라루스 시민단체인 '벨라루스의 민주주의를 위한 재한벨라루스시민모임'에 의하면, 한국은 벨라루스 당국의 심각한 인권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대선 이후 벨라루스 정부인사들과 무려 14차례나 협력회의를 지속해왔다. 대부분은 양국간 교역과 투자 확대 방안에 관한 논의였고 인권문제는 공식적으로 거론된 바 없다.
이에 이들은 3월 21일에 이어 지난 6월 13일 교보문고 앞에서 '벨라루스 정부의 인권탄압 무시하는 한국-벨라루스 양국 협력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재한벨라루스시민모임은 한국 정부와 지방정부, 국회가 벨라루스의 인권위기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벨라루스에 민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공식적인 협력을 유보하기를 촉구했다.
이들은 한국 기업들을 향해 벨라루스 국영 기업들과의 무역을 중단하고, 한국 언론이 벨라루스의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을 보도해 민주화운동을 지지해주길 호소했다. 또한 이들은 "벨라루스 국민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한국 정부의 이런 행보가 저희에겐 큰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고, 저희가 한국에 사는 것이 안전한지 의문조차 드는 심정"이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호소문 전문 보기☞페이스북 '벨라루스의 민주주의를 위한 재한벨라루스시민모임').
필자는 양국 간 교류와 협력에 대한 재한벨라루스시민모임의 우려를 접한 뒤 15일 서면으로 해당 모임에서 활동하는 벨라루스인 미하일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는 질문과 응답을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한국도 독재정권 경험했는데... 벨라루스 국민 고통 이해해달라"
- '벨라루스의 민주주의를 위한 재한벨라루스시민모임'에서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무슨 취지로 기획했나.
"고국 벨라루스에서 인권위기가 더 심각하게 악화되는 상황을 알리고,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진행되는 한국-벨라루스 양국간 협력의 문제점을 알리고 싶었다. 벨라루스에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조직범죄집단인 루카셴코 정권과의 협력 및 이를 재정지원하는 국영기업과의 무역을 유보해달라고 요청했고, 아울러 한국 시민들이 벨라루스 국민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해주실 것을 호소하고 싶었다."
- 지난달 한국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고 있을 때 루카셴코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시위참가자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도 허용하는 법에 서명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경찰의 본분을 망각한 이런 입법은 상상하기 어렵다. 현지와 국제사회의 반응은 어떤지 알고 싶다.
"정말 참담하다. 이전에는 극단적인 예외적 필요에 의해서만 경찰 근무 중 면책권이 보장됐던 반면 이젠 구체적인 조건들이 삭제됐다. '물리적 공격, 특별 장비, 무기 사용이 적법할 때'라는 막연한 문구로 대체됐다. 그러나 어차피 합법적인 대통령이 아닌, 루카셴코 대통령이 서명한 어떤 법도 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자조적으로 벨라루스에선 시민권을 탄압하는 법을 제외하곤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불행히도 이 법의 성격상 앞으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면 실제로 적용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잘 모르겠다. 지난 대선 이후 벨라루스에서 나오는 수많은 뉴스들에 묻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국경없는기자회'에 의하면 벨라루스는 유럽 내 기자들에게 제일 위험한 국가로 분류된다.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가.
"우리는 코가 부러지거나 총을 맞은 기자들을 목격하기도 했고, 집회를 생중계했다며 취재 활동한 것만으로도 감옥에 간 기자들을 봐왔다. 독립언론 매체의 기자들은 종종 경찰의 목표가 되고 있다.
벨라루스 당국은 대개 국영 TV 채널을 통해 프로파간다(선전)를 유포하는데, 주로 노인층 및 기성세대가 대상이다. 반면 인터넷 매체는 더 적절한 관점을 제시하며 젊은 세대에게 호응을 얻어왔다. 정부 당국이 이렇듯 대놓고 언론탄압을 하는 것은 '현 위기상황을 전하는 기자들이 없어지면, 국가가 승인하는 정보만 사회에 전달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정부의 언론탄압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벨라루스 당국은 5월 18일 벨라루스의 최대 독립 인터넷 매체인 'TUT.BY'를 강제 폐쇄했다. 인터넷 사용자의 63%에게 뉴스를 제공해 온 이 매체는 한국의 다음·네이버 등 포털과 유사한 영향력을 가졌는데, 정부는 최고경영진을 탈세 및 미디어정책 위반 혐의를 빌미로 체포하고 웹사이트를 폐쇄했다. 제가 매일 컴퓨터를 열 때마다 제일 처음 방문하는 웹사이트였다. 지금도 습관상 가끔 가곤 하는데 '이 사이트는 접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볼 때마다 이 정권의 광기가 연상된다."
- 재한벨라루스시민모임이 제작한 웹자보를 봤다. 그간 내용만 보더라도 지난 8월 대선 이후 한국 정부와 국회가 벨라루스 정부 인사들과 14차례나 협력회의를 지속해왔는데, 이런 양국 교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저희에게 이런 행보는 아주 불쾌하다. 저희는 한국이 민주적 가치를 지지하는 민주국가라고 믿었는데 벨라루스의 인권위기에 대해 침묵할 뿐만 아니라, 루카셴코와 그 정권을 합법적인 파트너로 대한다는 것을 알게 돼 실망이 크다. 우리는 그간 한국에 주재하는 벨라루스대사관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송철호 울산시장, 안경원 창원부시장 등 한국의 정부관료들이 루카셴코 정권의 대표들과 악수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지난 4월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 주재 한국대사는 벨라루스의 경제부장관을 만나 양국간 교역과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에 관해 논의했다. 얼마 후 한국무역협회 (KITA)의 이관섭 부회장의 미팅도 이어졌다고 안다. 지난 12월 KITA가 서명한 이 협력안에 의하면, '한-벨라루스 기업협의회' 출범도 올해 예정돼 있다고 알고 있다.
국회 차원에서는, 지난 2월 벨라루스 대사가 송영길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현 민주당 대표)과 양국 협력에 관해 미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미팅 후 공식 발표를 살펴보면, 벨라루스의 인권 위기는 전혀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 같다.
대선 이후 한벨 양국 간의 전반적인 협력관계를 지켜보면, 한국이 독재자 지지라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 같아 무척 실망스럽다. 이분들이 최근 라이언에어 강제착륙사건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파트너가 유럽의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저희는 한국정부가 협력전략에 대해 재고하고, 벨라루스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해줄 것을 희망한다. 한국도 지난 수십 년간 혹독한 독재정권을 직접 경험한 바 있으니 현재 비슷한 역사적 시기를 보내고 있는 벨라루스 국민들의 고통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공식 웹사이트를 보니 현 정부가 유라시아 지역의 국가들과 운송, 물류, 에너지 분야 등에서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벨 양국간의 무역이 벨라루스 민주화운동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지.
"한마디로 작년 부정선거 이래 민주주의 국가 중 한국만큼 벨라루스와의 무역을 홍보하고 있는 나라가 없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도 지난 3월 '한벨 비지니스 파트너쉽 웨비나'를 개최하는 걸 보면서 벨라루스 독재정권과의 협력을 반기고 있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파트너 관계는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추후 한국의 기업에도 실제로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잘 아시다시피, 라이언에어 민항기 사건 이후 유럽연합 27개국은 벨라루스 항공사의 EU 영공비행 및 공항 사용 금지를 강행했고, 유럽 항공사들에도 벨라루스 영공 비행을 피하라고 권고 중이다.
이 사실 만으로도 루카셴코 정권하 벨라루스 운송과 물류산업과의 교역이 얼마나 불안정하지 알 수 있다. 저는 또한 국채가 쌓이고 있는 벨라루스 당국이 대금을 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유럽의 벨라루스 정부 추가 제재조치의 일환으로 벨라루스의 SWIFT 지불 시스템 차단도 고려 중이라는 언론보도도 보인다.
한국의 기업이 미국 제재 아래 있는 벨라루스 국영기업과 무역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그 이유는 나프탄 정유회사(OJSC Naftan), 화학회사 그로드노아조트 (GrodnoAzot)및 이들의 계열사·파트너 회사들과 거래를 하는 한국기업 및 은행에도 제재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벨라루스의 한국 수출액은 3900만 달러이며, 벨라루스국영기업 벨라루스칼리사가 제조하는 칼륨비료가 작년 한국의 최대 수입 품목이었다. 이 벨라루스칼리사 또한 곧 미국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벨라루스 국영기업으로부터 수입한다면 이 대금의 막대한 부분은 벨라루스 독재시스템을 지탱하는 보안세력, 친정부 세력의 월급으로 지급되는 셈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꼭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 한국 국민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벨라루스라는 나라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벨라루스의 심각한 인권위기 상황과 용감히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소식을 여러분들이 널리 공유해주셨으면 좋겠다. 우리의 절박한 현실과 비인간적인 독재자를 타도하고 싶은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한국인들과 나누고 싶고, 또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도 찾고 싶다.
저희는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고, 민주화운동에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한국분들과 언제든지 소통할 용의가 있다. 현 벨라루스 상황은
'벨라루스 정보센터'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BelarusKorea )과
인스타그램( instagram.com/belaruskr )계정을 통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저희의 한국어가 부족해서 애를 먹고 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들의 연락을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