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조선혁명가가 된 인물에서 이어집니다.
귀국한 '연안파'(조선독립동맹)는 정치 활동을 앞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무정과 박일우, 김창만, 허정숙, 윤공흠, 서휘, 이상조는 조선공산당에 참여해서 활동하자는 입장이었다. 김두봉과 최창익, 한빈은 독자 정당을 만들자는 입장을 폈다.
해방된 조선에서 연안파에 대한 기대는 컸다. 김두봉을 비롯한 연안파의 '명성'과 '경력'은 김일성에 못지않았고, 만주파로 불린 김일성 집단에 비해 밀리지 않을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연안파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파가 정권을 장악한 배경에는 소련이 힘을 실어준 이유도 있지만, 만주파가 강한 결속력을 지녔다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1946년 1월 25일, 한빈은 남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의 기반을 키우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이때 그는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이었다. 한빈은 '백마 탄 장군'이라 불린 여성 혁명가 김명시(金明時)와 함께 순회 강연을 했다. 2월 5일 조선독립동맹은 경성특별위원회(위원장 백남운)를 설치했다.
1946년 2월 15일 결성된 통일전선 조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서 한빈은 부의장을 맡았다. 1946년 3월 6일 조선독립동맹은 '조선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꾸며, 정치세력에서 정당으로 전환했다. 한빈은 조선신민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박헌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합류가 아닌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구했던 한빈을, 박헌영은 '분열주의자'로 공격했다.
북조선종합대학이 '김일성대학'이 된 사연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합당하면서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다. 8월 30일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때 한빈은 43명의 중앙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당시 그의 서열은 39위였다. 연안파에서 한빈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그의 서열은 의아함을 갖게 한다.
1946년 10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이 출범하자, 한빈은 초대 총장 김두봉과 함께 부총장을 맡았다. 총장이 상징적인 자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빈이 김일성대학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모택동대학, 이승만대학이 없던 시절, '북조선종합대학'이 '김일성대학'으로 명명된 이유는 뭘까? 옌안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학철은 부총장 한빈에게 직접 들은 사연을 회고로 남겼다.
"아 글쎄 학교 이름을 짓는 회의를 하는데 회의를 막 시작하자마자 아첨꾼 하나가 얼른 나서 가지고 '김일성대학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 어떡해. 일단 말을 낸 이상은 아무도 안 된다고 반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거든. 그래 그대로 돼버린 거지."
1947년 2월 20일 북한은 초대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237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 명단에 한빈은 들어 있지 않다. 1948년 9월 9일 출범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도 한빈은 눈에 띄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조선신민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을 맡았던 한빈은 연안파 중에서도 '거물'에 속했다. 일제강점기 해외와 조선을 오가며 쌓은 그의 명성과 투쟁 경력은 김일성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북조선에서 중용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최창익은 내각 부수상을 맡았고, 그와 동갑인 무정은 조선인민군 포병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허정숙이 조선로동당 선전문화상을, 그보다 7살 어린 김창만은 조선로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남북한 국가도서관에서 펼쳐진 '묘한 장면'
한빈은 김일성대학 부총장에서 물러난 후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1947년 초나 그전에 국립중앙도서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은, 1946년 출범한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또는 2대 관장으로 재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
북한은 1945년 11월 5일 개관한 평양시립도서관을 1946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전환했다(북한은 '국립중앙도서관' 명칭을 남한보다 먼저 사용했다). 북한의 국가도서관이 된 국립중앙도서관은 1973년 '중앙도서관' 시절을 거쳐, 1982년 '인민대학습당'으로 바뀌었다.
한빈은 1953~1954년 무렵까지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낸 걸로 보인다. 한빈은 왜 국립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었을까? 앞서 한빈이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레닌그라드국립대학,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차례로 공부했다고 언급했다.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도서관을 건립하면서, 러시아대학과 도서관을 경험한 한빈이 적임자로 떠오르지 않았나 싶다.
1950년대 남북한 국가도서관에 '묘한 장면'이 하나 연출된다. 1956년 5월부터 1957년 1월까지 남한의 국립도서관장은 정홍섭이었다. 정홍섭은 일제강점기 친일 관료 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비슷한 시기 남한에서는 정홍섭이라는 친일파가, 북한에서는 한빈이라는 독립운동가가 국가도서관장을 각각 맡은 셈이다. 한빈은 남북한을 통틀어 일제에 맞서 총을 든, 유일한 국가도서관장이다.
'도서관'은, 10대 때부터 공산주의자로 조국 해방을 위해 투사로 살았던 한빈이 마지막 자취를 남긴 장소다. 도서관을 중시한 북한 사회에서 국가도서관의 위상이 낮지 않았을 테지만, 혁명가로 치열하게 살며 해방 조국 건설을 꿈꾼 그에게는 아쉬운 자리였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장이 '종파주의자'로 내몰린 이유
1981년 중앙일보 동서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북한인명사전>은 한빈의 마지막 행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49년 2월 반당분자로 숙청"
<북한인명사전>은 한빈의 '숙청' 시기를 한국전쟁 이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소련의 여러 대학을 거친 한빈은, 연안파 중에 누구보다 소련 군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숙청된 이유는 뭘까?
해방 후 행보를 보면, 한빈은 '독자적 노선'을 통해 해방 조국의 건설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와 만주, 조선과 중국을 오가며 일제와 맞섰던 그는, 외세에 기대기보다 자주적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련 군정과 소련을 배경으로 등장한 김일성 체제에 비판적 입장이 아니었을까. 남과 북이 모두 외세에 기대어 독자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빈은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1953년 6월 중순부터 1958년까지 북한은 '종파주의'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주요 행정기관과 공장에 지도그룹을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은 종파주의 행태로 지적을 받았다. 당시 북한에서 지방당위원회 선전부 간부로 있던 김남식의 증언이다.
"도서관의 장서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이 다른 책들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배열되었고, 때때로 김일성에 관한 서적은 뒷전에 놓였는데, 이는 명백히 종파분자의 소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판은 한빈에게 집중되어 그는 악독한 종파행위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김남식의 증언처럼 도서관 장서의 분류와 배치를 이유로, 국립중앙도서관장 한빈은 '종파주의자'로 내몰렸다.
혁명은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배신한다
옌안에서 한빈과 함께 활동했던 김학철은 한빈의 '숙청'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다.
"이 무렵 한빈은 중앙도서관 관장(차관급 대우)으로 내려앉아도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소련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틀리면 아무 때고 나 한 몸 툭툭 털고 소련에 가면 고만 아니냐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1년 후 김일성은 허울 좋은 개살구로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고 전용 찻간까지 제공해 한빈을 추방했던 것이다."
'혁명은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배신한다'라고 했던가. 일제강점기부터 치열하게 싸워온 혁명 동지를 미제의 간첩으로, 정적으로, 종파주의자로 제거하고 추방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의 실체였을까.
김학철은 한국전쟁 정전 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 27일 이후 평양을 방문했다. 김학철은 자신이 평양을 방문한 시점으로부터 1년 후, 한빈이 김일성에 의해 추방되었다는 회고를 남겼다. 김학철의 회고가 정확하다면, 한빈이 김일성에게 추방된 시기는 1954년 무렵이다. 이 시기가 맞다면, 연안파의 거두 한빈은 무정에 이어 '연안파 숙청 2호'였던 셈이다.
한빈이 북한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관장이라면, 남북한 국가도서관 초대 수장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남한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북한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관장 한빈은 한국전쟁 후 숙청되어 조국으로부터 '추방' 당했으니까.
한빈의 숙청 시기는 한국전쟁 이전이라는 설부터 1954년 설, 1958년 설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다양한 설 중 김학철의 회고가 가장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1954년 무렵이 유력해 보인다. 시기가 문제일 뿐 국립중앙도서관장이었던 한빈이 '숙청'된 건 확실하다.
남과 북을 통틀어 정권에 의해 해외로 '추방'된 도서관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도서관장의 경우는 더더욱 찾기 어렵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중앙도서관장 한빈 사례는, 남북한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해외로 추방된 국가도서관장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신복룡 교수는 한국의 '분단'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한국의 분단은 '나뉨'(division)이 아니라 '갈라섬'(separation)이었다."
우리의 '분단'은 남과 북뿐 아니라 각각의 체제 안, 정파와 정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격렬하게 이뤄졌다. 이런 '분단'을 예견해서였을까. 1946년 2월 10일 서울 국립도서관 근처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독립동맹 환영회에서 한빈은 이런 '답사'(答辭)를 했다.
"조국을 사랑하면 다 같이 손을 잡자."
안타깝게도 '다 같이 손을 잡는' 상황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싸운 그들이 끝내 손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심산 김창숙은 해방 직후 '친일파'에 이어 '친미파'와 '친소파'가 들끓자,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나라가 소국(小國)인 것은 우리 땅이 작고 좁아서가 아니라 사대주의적인 소인배(小人輩)가 많아 소국이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했으나 '조선 혁명'의 길을 걷고자 했던 한빈의 추방은, 그래서 더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련으로 추방된 이후 한빈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국 해방을 위해 분투했던 그는 조국으로부터 추방되었고, 남과 북 모두로부터 잊혔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체제에 맞섰다는 이유로 잊혔다. 소련 군정과 김일성 체제에 맞선 '국립중앙도서관장'은 그렇게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한빈을 비롯한 독립운동가가 수십 년 동안 타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싸운 것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잊히기 위해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이즘'(ism)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잊음'이라는 '이즘'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