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은 동학에 입도한 이후까지도 아명인 최경상으로 불리다가 49세 때인 1875년 10월(음) "도(道)는 때를 따르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가야 한다(用時用活)"고 하여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해월이란 호는 1863년 수운으로부터 '해월당(海月堂)'이란 도호를 받으면서 사용한 것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스승이 순도한 뒤 최시형은 영양의 일월산 기슭 용화동 마을에 은거하며 매일 짚신 두 켤레를 삼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업이었다. 관의 추적을 피해 언제라도 피신할 수 있도록 항상 짚신 한 켤레와 밥 한 끼를 넣은 봇짐을 옆에 두어 뒷날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1세 교조가 참변을 당하고 동학의 지도자들 다수가 잇따라 처형ㆍ투옥되거나 자취를 감추면서 일반 도인들은 분노에 떨었다. 그런 가운데 최시형이 용화동 마을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이 일부 도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곧이어 대선사(최제우)의 부인과 아들 등 유족이 이곳에 도착하여 이웃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최시형은 대선사의 유족 돌보기를 가족보다 먼저하였다. 이들도 포교들의 눈을 피해 거처를 수시로 옮겨야 했다.
그는 자기네 식구와 함께 최제우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와서 울진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짚신도 삼고 농사도 지으면서 두 집 살림을 꾸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머슴살이로 단련된 솜씨를 보였고 타고난 근면성으로 농사일을 해냈다.
최시형은 은신처가 마련되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은밀히 각지에 사람을 보내, 흩어진 도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동학체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갑자년 이후로부터 도인이라는 사람들은 혹 죽고 혹은 살아남은 사람도 있으며, 혹은 도를 버리고 서로 상통(相通)하지 않아, 오랫동안 발길이 끊어져, 피차간에 서로 보기를 원수 보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하며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
주인은 산으로 들어간 뒤, 몸은 산옹(山翁)이 되었고, 농사일에 극력 힘을 쓰며, 스스로 발각되고 또 노출될 위험을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즈음 선생의 집은 그 생활의 어려움을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이즈음 국내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비롯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각지의 민란에 이어 예언서라는 『정감록』이 나돌아 민심을 더욱 뒤흔들었다. 1868년 8월 정덕기라는 인물은 자신이 정도령이라 칭하며 난을 일으키려다 사형 당하였다. 1871년 4월의 신미양요에 이어 비슷한 시기에 동학도 이필재가 경상도 영해에서 교조신원을 내세우며 거사에 나섰다.
이필재는 거사를 준비하면서 측근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직접 최시형을 찾아와 교조신원에 함께 나서길 간청하였다. 최시형은 대단히 신중한 품성의 인물이다.
이에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을 듣건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여겼다. 다만 마음에 시험할 뜻이 있어, 며칠을 머물며 그 동정을 살펴보니, 하루에 서너 번 변하면서도 오직 한가지로 선생님의 원통함을 이야기하니, 이런 까닭으로 억지로 따르기는 하여도 미심쩍은 바가 있어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말하기를,
"천만 가지 일이 빨리 하고자 하면 실패하는 것이라. 물러나 머물면서 가을에 일을 일으키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필재가 소리 높여 크게 말하기를
"나의 큰일을 그대가 어찌 물리쳐 멈추고자 하는가? 다시는 번거로운 소리를 하지 말라."
최시형은 이필재가 수운의 기일을 택해 교조신원을 위해 영해에서 봉기하겠다는데 모른 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또 많은 도인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봉기를 묵인 또는 양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필재는 1871년 3월 10일 교조신원을 내세우며 영해에서 600여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봉기, 관아를 공격하고 부사를 처형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8월에 다시 조령에서 시도했으나 거사 직전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능지처참 당했다.
이 사건으로 최시형과 동학도들은 다시 관의 극심한 추적을 받게 되었다.
주석
3> 이이화, 앞의 책.
4> 윤석산 역주, 『초기동학의 역사』, 123쪽.
5> 앞의 책, 14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