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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 ⓒ 안병기
 
모든 종교에는 '경전(經典)'이 있다. 원래는 성인ㆍ현인이 지은 책이나 글 또는 불교의 교리를 적은 책을 일컫고, 유교의 교리를 지은 책을 경권(經券)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이라 부른다.
 
대원군이 최제우를 처형할 때 조정은 그가 남긴 설법집을 비롯하여 많은 자료를 압수하여 불태웠다. 더 늦기 전에 남은 자료를 모으고 생존한 측근들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는 일이 최시형의 과제였다. 뒷날 "동학 교리의 체계화, 동학 조직의 재건과 지역적 기반의 확대, 경전의 집성, 제도와 의식의 확립, 정기적 수련 제도의 실시를 통한 지도자의 양성 (주석 9)등이 그의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여기서는 '동학교리의 집성'과 '경전의 집성'에 대해 살펴본다. 이필재의 '영해봉기' 이후 다시 관의 추적이 강화되자 최시형은 더 깊은 산골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는 이어 제자 강수(姜洙)만을 데리고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동굴 속에 살면서 14일을 나뭇잎으로 연명했다. 어느날 나무꾼의 도시락을 얻어먹었고 계속 나무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이었다. 이때 그의 맏아들은 잡혀가 장사(杖死)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의 부인과 작은아들마저 모진 고초를 겪은 끝에 병사했다. 그의 혈통이 끊어짐은 물론, 혈혈단신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지하에서의 포덕은 결코 그치지 않았다." (주석 10)
 
그는 포덕과 함께 동학의 경전 간행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동학 내부에는 그가 이미 1865년에 "구송(口誦)을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스승의 가르침의 글들을 받아 쓰게 하였지만, 이때 받아 쓴 글들은 필사로 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해월신사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확정하기 위하여 '도적(道跡)' 및 '경전(經典)'을 대대적으로 판각하여 간행하고자 위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주석 11)
 
조선조 말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도탄에 빠진 민중에게 한가닥 기댈 언덕이 되고, 이어서 원민과 항민을 호민으로 일깨워 반봉건ㆍ척왜척양의 근대민중혁명의 주역이 되고, 다시 3ㆍ1혁명의 중심이 된 동학의 대표적인 경전은 교조 최제우가 짓고 최시형이 간행한 『동경대전』이다.
 
동학관계 사서에는 이외에 『용담유사』와 최제우의 출생에서 득도와 순도 그리고 최시형이 『동경대전』을 간행한 1880년까지의 동학역사를 담은 『최선생문집 도원기서』 등이 있다.
  
동경대전 목천판 계미중춘판   소장자가 제공한 동경대전 계미중춘판과 그에 따른 자료. 아랫줄 맨 오른쪽이 동경대전.
동경대전 목천판 계미중춘판 소장자가 제공한 동경대전 계미중춘판과 그에 따른 자료. 아랫줄 맨 오른쪽이 동경대전. ⓒ 노준희
 
최시형은 1879년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 경전 간행소를 설치하고 동학의 경전 간행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인 1880년(경진년) 6월 14일 『동경대전』을 발간하였다.
 
이때 부쳐진 표제(表題)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직 경진판(庚辰板)이 발견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도원기서』의 기록에 의하면, 아, 아 선생의 문집(文集) 침재(鋟梓)를 경영한지…." 들의 기록으로 보아, 대신사의 글들이 아직 동학교단에서 '경전'이라는 인식보다는 '문집'으로서의 인식이 앞섰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주석 12)

최시형과 일부 동학도인들은 당초 스승의 글을 묶어 『최선생문집』으로 간행하였다. 얼마 뒤 재간하면서 '문집' 대신 '동경대전'이란 이름으로 바꿔 출간한 것이다. 제1대 교조 수운의 글을 '성인이 지은 글'로 격상하여 '경전'이라 한 것은, 당시 일반 도인들의 뜻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동경대전』을 간행한 다음날 최시형은 봉고식(奉告式)을 갖고 간행의 의미와 과정을 설명하였다.

아아, 선생의 문집(文集) 침재(鋟梓)를 경영한 지 한 해가 지나 이미 오래구나! 지금 경진년(庚辰年)에 나와 강시원(姜時元)ㆍ전시황(全時晄) 및 사람들이 장차 간판(刊板)을 경영하려고 발론(發論)을 하니, 각 접중(接中)이 다행히도 나의 의논과 같아 각소(刻所)를 인제 갑둔리(甲遁里)에 정하게 되었다. 준공하는 일이 뜻과 같아 비로소 편(篇)을 이루니, 이로써 선생님의 도(道)와 덕(德)을 밝히게 되었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각 접중에서 정성스러운 힘과 비용으로 쓸 재물을 낸 사람은 특별히 별록(別錄)에 그 공을 논하여 차례로 기록하여 쓴다.
 
경진년 중하(仲夏) 도주(道主) 최시형(崔時亨)이 삼가 기록하노라. (주석 13)


주석
9> 박맹수, 「동학혁명의 문화사적 의미」, 『문학과 사회』25, 290쪽, 문학과 지성사, 1994.
10> 이이화, 앞의 책, 259쪽.
11> 윤석산, 「해월신사의 생애와 리더십」, 28~29쪽.
12> 앞의 책, 29쪽.
13> 『초기동학의 역사』, 26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최시형#최시형평전#동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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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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