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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장군 생가에 세워진 사당 백야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코로나 탓인지 우리 일행 외에는 관람객이 한 명도 없었다.
김좌진 장군 생가에 세워진 사당 백야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코로나 탓인지 우리 일행 외에는 관람객이 한 명도 없었다. ⓒ 서부원
 
코로나로 인해 얼추 2년 만에 떠난 답사였다. 우리 학교의 사회과 교사들은 해마다 한두 차례 시의적절한 주제를 정해 답사를 진행해왔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는 모토로 시작한 자체 교과 연수 프로그램이다. 

지난 6월 26일 토요일, 충남 예산과 홍성으로 독립운동가 세 분의 고향을 찾았다. 매헌 윤봉길 의사와 백야 김좌진 장군,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이하 호칭 생략). 행정구역은 달라도 자동차로 20분 남짓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에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세 분의 생가가 모여있다. 

공교롭게도 당일은 72년 전 백범 김구가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한 날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대를 살다간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데에 맞춤한 날인 셈이다. 더욱이 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 아닌가. 

이곳은 예전에도 학급, 동아리 아이들과 함께 와본 적이 있다.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가볼 만한 유적지가 넘쳐나는 곳이기에 소풍이나 수학여행지로 제격인 곳이다. 천년고찰 수덕사에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현장 남연군묘가 지척이며, 유명 온천단지까지 끼고 있다. 

이번엔 역사 교사로서 일일 답사 가이드를 자청했다. 참여한 교사들의 전공 분야가 각양각색이어선지 다양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며 답사를 더욱 다채롭게 했다. 올해는 수목 전문가인 과학 교사까지 함께하여 유적지 주변에 심은 나무들에 대해 배우는 행운도 누렸다. 

생가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감나무와 기념관의 아름드리 전나무, 길가에 도열해있는 사철나무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적송까지 수목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풍광은 눈을 즐겁게 했고, 깊은 그늘은 때 이른 무더위를 식혀주었다. 나무만큼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윤봉길 사당 충의사에 박정희 친필 현판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다 이 글을 쓰게 만든 나무를 만났다. 김좌진의 영정을 모신 백야사 안뜰 귀퉁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함께한 수목 전문가도 그 나무의 품종은 낯설어했다. 나무 이름 대신 거기엔 나무를 심은 이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과거 내로라는 한 정치인이 이곳을 방문한 뒤 기념식수로 심어놓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적지 말고도 공원이나 건축물, 심지어 병원과 학교에도 고위 공직자들의 이름을 내건 나무는 차고도 넘친다. 전국의 기념식수만 한데 모아도 웬만한 숲 뺨칠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김좌진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린다지만, 실상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심은 것이다. 나무와 식재 비용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왔을지언정 땅은 무상으로 제공받은 셈이다. 한 번 심어놓으면 평생 자신의 이름을 내걸 수 있으니 '무명'보다 차라리 '악명'이 낫다는 정치인에게는 남는 장사다. 

기념식수만의 문제도 아니다. 사적지의 건물마다 걸려있는 현판에서도 정치인들의 '욕망'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나무야 뽑히거나 옮겨질 수도 있고 관심이 없으면 눈길조차 끌지 못하지만, 현판은 건물의 얼굴인 데다 불이 나기 전까지는 영원히 그 자리에 걸려있어 '홍보 효과'로 치면 비교가 안 된다. 

윤봉길의 사당인 충의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에 쓴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사실 이곳을 성역화한 장본인으로서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당과 기념관을 건립하고 생가를 복원하는 등 사적지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박정희의 공적은 높이 살 만하다. 

이곳 외에도 그의 집권 기간에 성역화한 사적지는 전국에 숱하다. 충무공 이순신 유적과 강화도 국방 유적, 동학농민운동 전승 유적 등으로부터 이승복 기념관 등 반공 유적과 전국 방방곡곡의 충혼탑 시설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적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곳에선 어김없이 그의 친필 현판을 볼 수 있다. 당시 집권자로서 정책적 결단이라는 '지분'이 있는 만큼 그 자체로 몽니 부릴 일은 아니다. 다만, 기념식수든 현판이든, 새겨진 이름이 자신의 치적을 대대손손 과시하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사적지에 모시는 위인과 역사적, 사회적으로 매칭되지 않는 인물이라면,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교훈은커녕 해악만 끼치게 된다. 도무지 김좌진의 업적과 기념식수에 이름이 박힌 정치인의 행적이 포개지지 않는다. 김좌진의 위업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심산으로만 보인다.

윤봉길과 박정희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 서부원
 
어울리지 않기는 윤봉길과 박정희도 매한가지다. 윤봉길은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가 지속되는 한 식민지 백성의 운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동시대를 살다간 청년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을 토벌한 만주군의 장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의열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아내와 두 아들에게 건넨 '유서'의 글귀다. 그는 자신의 이상이 부모와 처자에 대한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의 안위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결기다.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 동아시아의 지축을 흔들었던 대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침체에 빠졌던 항일 운동에 물꼬를 텄고,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됐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우뚝 선 건 온전히 윤봉길의 희생 덕이다. 

멸사봉공의 삶을 투탄 의거로 증명한 윤봉길은 일제에 의해 잔악무도한 방식으로 공개 처형당했다. 그가 순국한 지 8년이 지난 1940년, 박정희는 혈서를 쓰고 '견마지충(犬馬之忠)' 서약까지 하며 일제의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윤봉길의 의거와 죽음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전혀 상반된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68년 박정희가 윤봉길 사당을 짓고 친필 현판을 내걸 당시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삶을 기리기 위한 보훈의 의지였을까. 누구 말마따나, 일제의 수족 노릇을 한 자신의 비루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담은 나름의 노력은 아니었을까. 

백 보 양보해도,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을 듯하다. 직후 3선 개헌과 유신의 강행, 무수한 간첩단 조작 사건과 노동 탄압의 사례는 그가 보훈이나 성찰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방증한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1970년대를 당시의 사람들은 '겨울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떠벌리며 정치적 이득 취하려는 자

윤봉길은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가난하고 몽매한 이들과 함께한 농민운동가이자 휴머니스트였다. 박정희는 윤봉길의 명망에 기대어 자신의 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려는 노회한 정치인일 뿐이다. 현판에 새긴 그의 이름은 어쩌면 윤봉길의 위대한 삶에 누를 끼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당에 모신 위인의 업적은 희미해지고 후세 명망가들의 이름만 나부끼는 사적지의 풍경이 어색하다. 파란만장했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교훈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특정 정치인들의 입맛대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의식적으로라도 우리는 손가락 말고 달을 봐야 할 때다. 

듣자니까, 야권의 한 대통령 후보가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출정식을 연다고 한다. 파평 윤씨의 후손으로서 그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이미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현재 야당의 국회의원 신분인 윤봉길의 손녀도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무리 관련성을 떠올려보려 해도, 같은 가문이라는 것 말고는 그와 윤봉길은 매칭되기가 쉽지 않다. 주야장천 법치만 외치는 그에게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불법을 마다하지 않았던 윤봉길의 삶을 빗댈 순 없다. 과연 대통령 후보로 나선 그가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대의는 무엇일까.

그가 계승하겠다는 애국정신과 윤봉길의 그것은 일제강점기 윤봉길과 박정희의 상반된 삶만큼이나 간극이 커 보인다. 난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후손이라고, 동향이라고, 동문이라고 떠벌리며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는 믿고 거른다. 선거에 혈연, 지연, 학연을 끌어들이려는 후보는 떨어져야 한다. 그게 대한민국 발전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사족. 기념식수든 친필 현판이든 인지도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라면 자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몇 해 전 경남 합천의 임란창의기념관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봉기한 임진왜란 의병들을 기리는 곳에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뒤 권좌에 오른 전두환의 친필 현판이 버젓이 걸려있었다. 

임진왜란 의병의 호국정신을 전두환이 잇겠다는 건데,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우리 역사가 이렇게 소비된다면 역사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인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와 비슷한 일이 윤봉길과 김좌진의 생가 등 사적지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만의 억측일까.

#윤봉길#김좌진#박정희#친필 현판#기념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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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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