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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선생님 백범김구선생님
백범김구선생님백범김구선생님 ⓒ 이상민
 
19세기 말 조선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붕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관리의 충원과정인 과거제가 수구기득권층 자제들의 '입도선매'로 독점된 것이다. 몰락한 양반이나 평민들에게 유일한 출세의 사다리인 과거가 특정계층에 독점하면서 조선왕조는 백성들은 물론 지식층으로부터 극심한 이반현상을 불러왔다. 

이 시기 과거에서 낙방한 백범 김구가 알게 된 동학에 대한 인식, 황해도에서 충청도까지 최시형을 찾아가 입도하는 과정 그리고 그가 지켜보았던 해월선생의 인상 등을 통해 재건기의 동학의 실정을 알아본다.

김구는 18세 때인 1893년 해주에서 오응선에게 동학의 소식을 들었다.

"상놈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진하였으니 새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주석 3)

김구는 동학의 평등주의사상에 마음이 쏠려 입도하고 이어서 아버지도 도인이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이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헌자하여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하여 나를 아기접주라고 별명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주석 4)

'아기접주'의 소문이 본부에까지 전해지고 이듬해 최시형은 황해도지역 도인들을 불렀다. 

이듬해인 계사년 가을에 해월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敬通이라고 쓰니 공함이라는 뜻이다)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道儒) 열 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하나로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長安)이라는 해월선생 계신데 다달았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始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하는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사람으로 꼭꼭 찼었다. (주석 5)

김구의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최시형은 충청도 보은으로 옮겨 본격적인 포덕활동을 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다음은 그의 일행이 해월을 만나는 장면이다.

우리 일행 열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수고로이 왔다고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례나룻이 보기좋게 났는데 약간 검은 터럭이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큰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화로에 약탕관이 김이 나고 끓고 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한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孫應九), 김연국(金演局), 박인호(朴寅浩)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주석 6)

김구와 황해도 동학 일행은 각각 '접주'의 첩지를 받고 귀향하였다. 첩지에는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고 김구는 회고했다.


주석
3>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28쪽, 1947, 국사원. 
4> 앞의 책, 30쪽.
5> 앞의 책, 31~32쪽.
6> 앞의 책, 33~3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최시형평전#최시형#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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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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