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에 걸쳐서 안성 도심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두 발을 이용해서 샅샅이 둘러보았다. 이제 좀 더 범위를 넓혀 안성 전체에 걸쳐서 불교 유적을 중심으로 답사를 이어가고자 한다. 안성에는 크고 화려하거나 국보급 유적을 다수 지닌 사찰은 없을지 몰라도 절마다 가지고 있는 개성과 스토리가 각기 다르기에 전부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
먼저 칠장사다. 궁예와 임꺽정 그리고 어사 박문수까지 이름만 들어도 강렬한 인물들이 거쳐간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찰이다. 이 절을 가기 위해서는 안성의 산골을 꽤나 깊숙하게 들어가야만 한다. 안성은 강원도만큼 높은 산은 존재하지 않지만 칠장산, 서운산 등 명산이 많고, 그 골짜기를 따라 수많은 물길이 모여 안성 전역에 걸쳐 큰 규모의 저수지가 있다.
그중 금광, 고삼, 청룡호수들은 안성 8경에도 뽑힐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기에 많은 사람들이 휴식과 자연을 즐기기 위해 찾고 있다. 다음화에 안성의 자연에 대해서 한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각설하고 그 산길을 따라 청룡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는 길의 풍경이 아름다워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초지의 목가적인 풍경, 수많은 소떼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으며 노는 모습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 길의 끝에는 안성을 대표하는 명찰 칠장사가 자리한다. 다양한 인물들이 이 절을 거쳐간 만큼 독특한 설화가 많다.
먼저 언급할 인물은 버려진 신라 왕자로 태어나 미륵사상을 외치면서 나라를 세웠고, 나중에는 미쳐서 몰락하는 비극의 주인공 궁예란 인물이다. 끝내 역사의 패자로 전락했고, 우리에겐 드라마 <태조 왕건>의 광기 어린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인물이다. 안성엔 궁예의 흔적이 꽤나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칠장사인데 바로 그 궁예가 유년시절 왕권의 다툼을 피해 칠장사에서 동자승으로 지냈다고 전해진다.
궁예는 어린 시절 남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틈만 나면 활쏘기와 무예 연습에 열중하면서 그만의 미래를 그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칠장사를 거쳐간 또 하나의 인물인 임꺽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의적 임꺽정은 스승인 병해 대사를 만나러 칠장사에 자주 들렸다고 한다.
천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던 병해 대사의 사상은 임꺽정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꺽정은 이후 스승을 위해 '꺽정 불'이라 불리는 목조불상을 만들었고, 지금도 칠장사 극락전의 본존불로 모셔져 있다.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있는 칠장사의 매력은 일주문 바로 옆의 표지판에서 시작된다. 어사 박문수 길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칠장사의 나한전이라는 작은 불전과 박문수와 남다른 인연 덕분이다.
박문수가 천안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도중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나한전에서 불공을 드리고 잠에 들었는데 꿈에 나한이 나타나 시험의 시제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박문수는 3번째 도전만에 과거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덕분에 나한전 뒤편으로 어사 박문수 합격 다리가 세워져 있고, 시험에 합격하길 소망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리본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소원을 비는 이들이 많이 찾는 칠장사
칠장사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꿈을 이루고 싶은 민중들의 소망이 담긴 전설들이 녹아들었다. 칠장사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원통전, 극락전 등의 전각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국보 1점, 보물 5점, 경기도 유형문화재 7점, 향토 유적 2점 등 문화재가 풍부한 칠장사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명부전 처마 밑에 그려져 있는 벽화에 가있다. 그 외벽에는 칠장사를 세운 혜소 대사의 이야기와 궁예, 임꺽정과 얽힌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다. 불전에는 불교와 관련된 불화들 위주로만 그려진 게 보통인데 재밌는 역사만화를 본 듯 신선했다.
지면의 한계상 칠장사의 다양한 매력을 미처 소개하지 못한 듯하다. 칠장사를 나중에라도 방문하시는 독자분들께서는 이 절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사전에 알고 간다면 더욱 풍성한 답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칠장사를 나와 속칭 궁예 미륵으로 알려져 있는 기솔리 국사암 석조여래입상으로 이동해본다. 그동안 경기도의 많은 고장과 명소를 두루 방문했지만 모든 방문길이 수월한 편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국사암으로 가는 길은 손꼽히는 험난한 길이었다.
차 한 대도 겨우 다닐 만한 급격한 오르막 길을 식은땀 흘리며 갔다. 그 길의 끝에는 조그마한 암자가 산 중턱에 웅크린 듯 있었다. 주차장에서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급경사의 길을 천천히 올라가 본다. 그런데 이 올라가는 길이 또 만만치 않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릎을 잡으며 숨을 돌리길 수차례, 15분 동안의 예상치 못한 등산 끝에 궁예 미륵이 있다는 국사암에 도착했다. 절 자체는 최근에 지어진 듯,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지만 불전 바로 옆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의 석조불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게 조성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불이고, 미학적인 감동도 미술사적 의미도 크지 않다. 하지만 궁예라는 인물이 주는 강렬한 인상 덕분인지 3기의 석불에 감도는 위압감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3기의 미륵불 중 가운데 큰 미륵은 궁예라고 하고, 양 옆의 미륵은 궁예가 죽인 두 아들인 청광, 신광이라 일컫어진다. 안성 일대의 미륵불의 흔적은 국사암으로 들어가는 초입, 쌍미륵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조그만 절 뒤편의 2단 석축 위에는 각각 10미터의 간격을 두고 장승처럼 서 있는 두기의 석불, 기솔리 석불입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쪽의 석불을 '남 미륵', 서쪽을 '여 미륵'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최근까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 결과로 태봉 시기, 즉 궁예 정권 당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석불과 관련된 설화를 살펴보면 궁예의 설법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세웠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사실상 안성 땅은 궁예의 정신적 고향이 아니었을까?
안성과 궁예와 관련된 유적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보자.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칠장사와 처음으로 세력을 의탁해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던 죽주산성, 그리고 안성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미륵불까지. 한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궁예, 그는 역사의 패배자로 사라져 갔지만 이곳 안성에서 만큼은 그의 숨결을 엿볼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일주일 후 작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ugzm87와 블로그 https://wonmin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연, 취재, 출판 등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ugzm@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탁피디의 여행수다 또는 캡틴플레닛과 세계여행 팟캐스트에서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general_list.aspx?SRS_CD=0000013244에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