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나 선각자들이 위대한 것은 앞날을 내다보면서 남들이 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통해 당대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새 시대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자연만물을 인간과 똑같이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인격권을 부여하면서 '생명사상'을 발아시킨 것은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최시형은 지구적인 생태계의 위기 앞에 신음하고 있는 21세기 인류에게는, 세계인 어느 누구보다 앞서 이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경천ㆍ경인과 함께 자연(생태)을 삼위일체화한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고 자산이다. 그의 경물사상이 귀한 것은 물질숭배사상이 아닌 자연에 인간과 동등한 '인격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인(敬人)이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듯이, 경물(敬物)도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경물은 자연 생태계를 하늘의 모습으로 공경하는 것이다. 자연 생태계와 인간을 하나의 동포(物吾同胞)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과 자연은 엄격하게 구분되지만, 해월이 동포라고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천주의 우주 법칙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은 우주법을 거슬려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은 엄격한 우주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천주의 이치가 그대로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경물은 우주 법칙 또는 천주의 이치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삶의 자세이다. (주석 9)
최시형의 자연사랑, 생태존중에 관한 법설을 더 들어보자.
하늘과 땅은 부모와 같고, 부모는 하늘이나 땅과 같기 때문에 하늘, 땅, 부모는 일체입니다. 따라서 부모의 포태가 바로 하늘과 땅의 포태인데, 지금 사람들은 다만 부모 포태만 알아 섬길 줄 알지 하늘과 땅의 포태의 기운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울(하늘)은 우리를 덮고 있고, 땅은 우리를 싣고 있으니 큰 덕이 아니고 무엇이며, 해와 달이 우리를 비추고 있으니 이 어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며, 만물은 화(化)해 생겨나니 천지 이기(理氣)의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주에는(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혼원한 한 기운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한 걸음이라도 감히 경솔하게 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날, 내가 한가롭게 있는데 한 어린이가 나막신을 신고 빠르게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땅을 울리게 해서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 어린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다 아프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해야 합니다. 어머님의 살이 소중합니까, 버선이 더 소중합니까? 이 이치를 바로 알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면, 아무리 큰 비가 내려도 신발이 조금도 젖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현묘한 이치는 아는 이가 적을 뿐만 아니라, 행하는 이는 더욱 드물 것입니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큰 도의 본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주석 10)
최시형의 경천사상 중에는 기독교의 십계명에 상응하는 '십무천(十毋天)'을 제시하고 도인들에게 법설을 하였다. 양천과 경천의 구체적인 계율이다.
(1)무사천(毋欺天)하라.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2)무만천(毋慢天)하라.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라.
(3)무상천(毋傷天)하라. 한울님을 상하게 하지 말라.
(4)무난천(毋亂天)하라. 한울님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5)무요천(毋夭天)하라. 한울님을 일찍 죽게 하지 말라.
(6)무오천(毋汚天)하라. 한울님을 더럽히지 말라.
(7)무뇌천(毋餒天)하라. 한울님을 주리게 하지 말라.
(8)무회천(毋櫰天)하라. 한울님을 허물어지게 하지 말라.
(9)무염천(毋厭天)하라. 한울님을 싫어하게 하지 말라.
(10)무굴천(毋屈天)하라. 한울님을 굴하게 하지 말라. (주석 11)
십무천에 나타난 한울은 천지인으로서의 한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천(하느님)으로서의 한울,인(사람)으로서의 한울, 지(자연)로서의 한울을 모두 포함하는 삼태극적 신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울을 속이는 것'은 천지인 한울님 모두를 속이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해월의 신관은 "내 위에 있는 천(天)으로서의 하나님과 내 안에 있는 인(人)으로서의 하나님과 내 밖에 있는 지(地)로서의 하나님이 모두 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월의 경천론은 경인론과 경물론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석 12)
주석
9> 오문환, 『동학의 정치철학』, 206쪽, 모시는 사람들, 2003.
10> 최준식, 『개벽시대를 여는 사람들』, 79~81쪽, 주류성, 1998.
11> 『해월신사법설』 「십무천」
12> 허호익, 앞의 책, 44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