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0시 45분. 막 완성된 바질 페스토를 쿠키에 얹어 베어 물고 맥주 한 잔을 마셨다. 기분 좋았지만 내내 헛헛했다. 가족과 떨어져 자취 중인 47살 홀아비가 밤중에 혼자 하기엔 낯선 짓이다. 휴대전화로 바질 페스토 가격을 검색해보고는(수제 페스토는 대부분 만원 이상이었다) 한참을 치워야 할 주방(이랄 게 따로 없는)을 바라보았다. 웃음 섞인 짧은 숨이 쉬어졌다. 하!
작년부터 바질을 키워 먹었다. 뭐든지 다 있다는 상점에 역시나 있는 바질 씨를 사서 싹을 틔워 아파트 화단에 둔 길쭉한 화분 몇 개에 옮겨 심어 키웠다. 바질은 한해살이 풀로 햇빛과 물을 좋아하고 추위를 싫어하는 애들이다. 별 기술 없이 물만 잘 주면 되는, 맛과 향이 좋은 '꿀풀(허브)'이다.
내 경험상, 한국에서 무언갈 키우려면 모내기할 때 심어서 쑥쑥 올라오는 잎을 중간중간 따 먹다가 나락 벨 때쯤 일부러 꽃을 피워 씨를 받는 스케줄이 좋다. 내 경우, 첫해는 조바심이 나서 4월 말에 파종했는데 역시나 처음에 꽃샘추위로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 후 가을까지 더운 기간 동안 거의 매일 물을 주고 관리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잎을 따서 먹고 때론 이웃에 나눠주기도 하면서 소소한 기쁨과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올해. 호기롭게 더 많은 씨앗을 뿌렸고 더 많은 싹이 났다. 막 옮겨 심을 시기가 됐을 때 갑작스레 타 지역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이 아이들을 어찌 할까... 일단 심어놓고 아내한테 관리하라고 부탁할까?(광속 탈락) 모두 가져다가 자취방 근처에 심을까?(탈락) 현 상태로 모두 수확해서 최후의 만찬으로 끝을 낼까?(탈락)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어머니께 카톡이 왔다.
'아들, 상추랑 근대 뜯어놨으니까 가져가.'
무섭게 자라난 바질... 이거 어쩌지?
옳거니! 부모님 찬스! 고향집 마당 텃밭이면 이 정도 바질 농사는 거뜬하겠다! 마침 주말. 한 시간 거리, 당장 달려가서 듬성듬성, 뭉텅뭉텅 바질 모종을 심어놓고 왔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어머니 카톡.
'네가 심어놓은 거 아버지가 모두 다시 옮겨 심었다.'
첨부된 사진을 보니 국군의날 운동장에 서 있는 군인아저씨들처럼 그야말로 '오와열'이 딱 맞게 바질이 심겨 있었다. 모종 하나하나의 모양을 보니 정성을 많이 쏟은 모양이다. 농사꾼은 아니지만 최근 텃밭 가꾸기에 취미가 붙은 아버지께서 아들 일이라고 더 신경을 쓰셨단다.
두어 주 지난 주말, 다시 어머니 카톡. '바지인지 바질인지 무지하게 컸다, 빨리 와서 따 가라. 동네 사람들이 심어만 놓고 관리 안 한다고 한마디씩 한다.' 다시 고향집.
바질은 성장이 빠르다. 장마에 오이 자라듯 빨리, 무성하게 자란다. 그런데 화분에만 키워본 경험이 오판을 낳았다. 넘치도록 기름진 땅에 구속 없이 뿌리 뻗은 바질은 그야말로 무지하게 잘 자랐다. 약간의 무서움과 희열을 느끼며 바질잎을 땄다.
바질은 꽃이 피기 전에 윗잎을 두루 따주는데 바로 아래 줄기에 양쪽으로 올라오는 새 순 바로 위를 따주어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새로 돋아난 순이 각각 자라나 바질이 더욱 풍성하게 된다. 이론에 집중하며 조심조심 한 잎 한 잎 따는 나와는 달리 어머니와 아내는 손길에 거침이 없다.
나 : "알려드린 대로 살살 따셔야 해요...(ㅠㅠ)"
어머니 : "그렇게 따면 어느 천년에 다 따냐~?"
아내 : "다 먹기나 해~."
잠깐 사이에 제법 큰 검은 비닐봉지 세 개가 가득 찼다. 상추며, 오이며, 호박이며, 가지며... 더 주고 싶은 부모님 마음만큼 봉지가 또 채워졌다. 덕분에 시간 잘 보냈다는 부모님 말씀을 뒤로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알아서 하라는 아내, 그래 결심했어
아내는 늘어난 살림 실력에 더해 최근 빠져있는 미니멀라이프 생활 때문인지 시골에서 받아온 채소 따위를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게 먹는다. 그러나 바질만큼은 선을 그었다.
"당신이 알아서 해~."
나물로 무쳐 먹을 수도 없고... 너무 많은 바질을 어찌할지 막막했다.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 저녁까지 수를 내야 했다. 결국 아내가 거래하는 당근시장에 무료로 나눠주는 것으로 2/3의 물량을 해결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아쉬운 마음이 계속 남았다. '바질 페스토 해 먹게 넉넉하게 주세요'라는 당근시장 '호호님'의 글을 보고 결심했다. 나도 바질 페스토를 만들리라!
그렇게 된 것이다. 늦은 시각 도착한 자취방에서 변변한 도구도 없이 바질과 견과류와 마늘과 파마산 치즈를 갈고 레몬을 짜 넣어 자정까지 한 솥(적당한 그릇이 없어 작은 압력밥솥의 솥을 이용했다) 가득 바질 페스토를 만든 것이다.
양이 너무 많았으므로, 간 마늘을 그렇게 하듯, 넓적하게 펴서 칼등으로 홈을 내어 냉동실에 얼렸다. 나중에 한 칸씩 떼어내어 올리브기름과 후추와 소금을 곁들여 먹으리라.
새벽 0시 45분. 무척 피곤했지만 도저히 그냥 잘 수가 없었다. 솥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바질을 손가락으로 알뜰하게 긁어 쿠키 위에 얹었다. 맥주를 먼저 마실까 하다가 바질(과 쿠키)를 먼저 먹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바질이 주인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