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직장 외부 회의에 참석할 때가 있다. 지난 금요일 오후 7시에도 부모 조직 구성을 위한 준비 모임이 있었다. 이동하면서 큰 아들 주영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가 오늘 지곡동 카페에서 회의가 있는데, 1시간 정도면 끝날 거 같아. 음... 그런데 조금 늦어질 수도 있어. 너 학원 8시에 끝나는데 아빠가 데리러 갈까, 아니면 그냥 버스 타고 올래?"
"다다음주부터 시험이니까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게."
"그래. 그럼 아빠가 회의 마치고 가면서 전화할게."
회의는 8시5분쯤 끝났다. 차에 시동을 켜고, 주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동차의 블루투스 기능을 통해 통화가 연결되었다. 전주-군산 전용도로에서 군산대학교 방향의 도로로 막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빠. 나 그냥 버스 탔어."
"야. 너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후. 알겠어. 끊어."
나는 어쩔 수 없이 군산대학교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 앉아 피자를 먹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오늘 점심 모임에서 먹고 남아서 잠시 집에 들러 냉장고에 넣어둔 피자였다. 아내에게 문자로 주영, 주원이에게 각각 한 조각씩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접시 위에는 두 조각의 피자가 있었다. 주원이는 아토피가 있었기 때문에 먹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서 피자를 두 조각이나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심술이 났다. 장난 반 진심 반의 마음으로 한 마디 던졌다. 전화 통화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었던 아들이 좀 얄밉기도 했다.
"너 왜 내가 가져온 피자 먹고 있냐? 먹지 마라."
"아. 그래? 안 먹어. 안 먹으면 되잖아!"
녀석도 더 당당하게 나왔다. 더 얄미워져서 왜 약속을 어기고 버스를 탔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지 않냐라며 잔소리를 해댔다.
아이도 억울했는지 울먹이며 흥분한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빠 회의가 8시 조금 넘어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을 8시 30분이 넘어서 끝날 거라고 판단했고, 학원이 끝나자마자 버스를 타면서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날 따라 학원이 약 10분 늦게 끝났고, 부랴부랴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아빠에게 전화할 타이밍을 놓쳤다. 자기 딴에는 아빠가 피곤할까 봐 그냥 버스 타고 집에 가려했고, 가면서 전화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서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던 마음이었고, 주영이는 반대로 아빠를 생각해서 그냥 버스 타고 집에 오려고 했다. 아내는 왜 계속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냐면서 이제 그만하라고 말렸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이제는 아들 편을 드는 듯한(?) 아내의 모습도 미웠다.
속사포 랩 같은 혈투가 끝나고 냉전이 찾아왔다. 주영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막 먹을 참이었다.
가방에서 김밥 한 줄을 꺼냈다. 저녁 모임에서 먹으라고 준 건데 주영이가 좋아할 거 같아서 챙겨온 거다. 자존심 다 내려놓고, 아들 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싸운 건 싸운 거고, 저녁은 먹어야지. 김밥 책상 위에 놓을게. 먹어라."
기념품으로 받은 탁상용 미니선풍기도 주영이 주려고 기관에서 가져왔지만, 그건 차마 건네주지 못했다.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나 할까(하하하).
평소 나는 자녀와 청소년의 독립과 자립을 조금씩 지속적으로 인정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랑은 계속 주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며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새삼 느꼈다.
앞으로 두 아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여전히 고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관점으로만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봤다. 예전에 <배려>라는 책에서 이런 문구를 봤다. 배려라는 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나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베풀려고 했던 건 아닌지, 또 그것을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오히려 한 번이라도 더 아이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행동하는 게 나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았을까 반성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