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
제주 이주 첫해의 12월이 시작되는 이번 주는 제주4·3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얼마 전 우연히 '시민 4·3아카데미'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지원했다. 간단한 인적 사항과 자기소개를 적어 응모한 것인데, 뜻밖에도 수강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아마 육지에서 이주해온 도민이 4·3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까 배려해준 게 아닐까 싶다. 제주4·3평화재단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12월 첫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강의, 그리고 금요일은 4·3유적지 현장답사로 진행됐다. 이번 시민 아카데미가 11기인 것을 보면 10년 넘게 이어져온 행사인 것 같다.
첫날 오후 7시 개강 시간에 맞춰 제주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으로 갔다. 입구에서 등록을 하니 강의자료 책자와 함께 저녁식사용 김밥과 음료수까지 챙겨줬다. 아카데미에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니 100명 안팎 정도는 되어 보였다. 청년·중년·노년층 등 다양한 사람들이 대형 강의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첫 시간은 한국현대사의 재해석이란 주제로, 역사학자 주철희 여순연구센터장이 강사로 나섰다. 이날 강의내용 중 내가 주목했던 건 4·3의 정명 문제, 즉 4·3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직도 제주4·3이라고만 말한다. 그것이 '사건'인지, '폭동'인지, '항쟁'인지, '학살'인지 성격을 규정하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4·3이라고 지칭한다.
주철희씨는 제주4·3항쟁 혹은 제주4·3민중항쟁으로 불러 역사적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1947년 삼일절 행사부터 시작하여 1948년 4월 3일 단독정부 수립반대 투쟁 등 해방 이후 제반 사항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제주도민의 관점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항쟁'으로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철희씨에 이어 양조훈 4·3평화재단이사장,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김수열 시인 등의 강의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됐다. 4·3의 발단과 당시의 사회상, 토벌대의 만행을 주도한 책임자들 면면과 피해상황 등 전반적인 내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또 제주의 민중사, 4·3을 다룬 시·소설·음반·미술·영화 등 다양한 내용을 섭렵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제주사회의 분위기와 역사적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주와 일본의 관계, 제주사람들의 높은 교육열과 사회 의식에 관심이 갔다.
제주와 일본
제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많은 제주사람들이 일본으로 갔고, 오사카 지역에 특히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기미가요마루였다.
이 배가 제주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승객이 많아 돈을 많이 벌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왜 우리가 일본 여객선을 타고 가야 하는가. 그들의 배만 불려줄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배를 마련해 이용하자"는 여론이 형성됐고, 결국 자금을 모아 선박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목을 들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주인의 단결력과 저항의식을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했다. 이렇게 십시일반 제주인들의 성금을 모아 마련한 배가 복옥환이었다. 이 배가 제주항·애월항·모슬포항·서귀포항 등으로 한바퀴 돌면서 승객들을 실어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렇게 제주-오사카 정기여객선이 호황을 누릴 만큼 수요가 많았던 것은 1920년대 오사카에 중공업이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장노동자를 가까운 제주도에서 충원한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제주도 인구가 20여 만 명이었는데, 이중 5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에 갔다고 하니 한 집에서 1명꼴로 간 셈이다.
제주인들이 대거 오사카 지역으로 갔고, 또 해방 후 앞다투어 귀환하면서 제주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했다. 일본에서 생활한 제주인들 가운데는 대학졸업자도 많았다. 또 당시 세계의 새로운 사상 조류로 대두한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높은 사회의식을 지니게 된 제주사람들이 대거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귀국해보니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 도탄에 빠진 민중의 생활상과 사회적 모순은 여전했다. 날이 갈수록 저항의식이 높아만 갔고, 마침내 4·3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제주 사회에 불어닥친 변화 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높은 교육열이다. 해방 후 2년 내 제주도에 신설된 학교가 초등학교 44개교(학생수 2만→3만 8천 명), 중등학교 10개교(학생수 3백→3600명)에 달할 정도였다.
1947년 미군정청 조사에 의하면 소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이 전국 15개 중소도시 중 가장 높았다. 북제주 35.7%, 다음으로 창원 26.7%, 강릉 25.6%, 울산 23.8% 등의 순이다. 제주올레 길을 걷다 보면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공덕비를 가끔 만나게 되는데, 읽어보면 상당수가 일본에 갔던 아무개가 돈을 벌어 학교를 설립했다거나, 무슨 훌륭한 기여를 했다는 내용이다.
절멸의 위기
이밖에 4·3아카데미를 통해 제주도라는 섬이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해방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규슈나 제주도를 거쳐 일본 본토를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일제는 제주도에 일본군 7만을 주둔시켜 결사항전 태세를 갖추고 온갖 대비책을 강구했다. 저 유명한 가미카제 특공대뿐 아니라 어뢰정으로 적의 군함에 박치기 하는 자살공격, 그리고 제주도민 수십 만 명을 동원해 한라산과 오름에 굴을 파고 유격전을 벌이는 등의 옥쇄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판 수많은 동굴진지의 본부가 어승생악으로, 한라산 등반로 가운데 하나인 어리목 부근에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제가 미군과의 결전을 1945년 9월 중순경으로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의 항복이 한 달만 더 늦었더라도 제주도 전역이 초토화됐을 것이고, 제주도 사람들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나 집단 자결로 희생된 민간인이 12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제주도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시민 아카데미 마지막 수업은 4·3 유적지 현장답사다. 버스를 타고 제주시내에서 가까운 4·3 현장을 다녀왔다. 처음 찾아간 곳은 관음사 뒤편 야트막한 야산. 한라산 백록담으로 통하는 바로 그 등산로 부근이다. 돌무더기로 참호를 만들어 총격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했다.
무표정한 돌무더기가 12월의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 돌무더기 참호를 사이에 두고 무장대와 토벌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장면을 연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인솔자가 열심히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지만, 마음이 심란해지니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4·3 당시 관음사에는 인민유격대장 이덕구를 비롯한 무장대 사령부 15명 정도가 경내에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1949년 1월 4일부터 한라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자 관음사 일대가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전투 초기에는 무장대가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L-5 미군정찰기가 집중 폭격을 가하고 토벌대의 맹렬한 총격이 뒤따르자 무장대가 심한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대규모 전투 끝에 관음사를 접수한 2연대 토벌대가 1949년 2월 12일 돌연 관음사를 방화, 모든 건물을 전소시켰다. 관음사에 불을 놓는 순간 화창한 대낮인데도 갑자기 천둥벼락이 쳤으며, 대웅전의 300년 된 나무 불상이 타기 시작하자 몸체가 번쩍번쩍 빛을 내다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스로 폭발했다.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지는 관음사 방화사건이다.
군인이 군인에게 집단총살 당해
관음사를 떠나 '잃어버린 마을' 세 군데를 더 찾아갔다.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타 없어진 곳들이다. 마을은 형체가 사라지고 사람도 몰살당해 끝내 재건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이름의 유적지 안내판만 서 있는 곳이다.
76가구 400명이 살았다는 오등리 죽성마을. 농축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1948년 11월 7일 오등리 전체 가옥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아래쪽 도남리로 피신했다. 이에 토벌대가 도남리까지 방화하면서 희생자는 더 늘어났다.
이 지역은 군인이 군인에게 집단총살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모슬포대대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괄시를 받던 죽성부대가 이곳 설새미에 주둔했다.
이 부대는 모슬포 9연대 소속이었으나 일부 장병들이 한라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에 합류한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경원시 당하게 된다. 죽성부대가 제주 출신 병력으로 이루어져 믿지 못할 부대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 부대는 토벌 작전과 각종 보급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 결국 죽성부대 병력은 1948년 겨울 내내 토벌작전에 동원된 후 사상 검열에 걸려 집단 학살됐다.
군인들이 천막을 쳐 숙영했던 곳은 삼나무 숲으로 덮여 있고, 음용수로 이용했던 설샘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4·3 이전만 해도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밭으로 변해 있거나 일부 올레(집에서 큰길로 나가는 짧은 골목길)와 대나무 등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이름도 아름다운 어우눌과 해산이 마을. 1949년 1월 한날 한시에 방화 소각된 곳이다. 150여 년의 설촌 역사를 지닌 어우눌 마을은 130여 명이 살았고, 유학자들이 서당을 지어 교육을 했던 유서깊은 마을이다.
어우눌과 해산이 마을 옛터에는 지금도 당시 주민들이 살았던 집터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채 남아 있다.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돼 집들은 사라졌지만 올레와 마을길의 흔적이 보였다.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의와 현장답사로 4·3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접해왔던 4·3의 전모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4·3의 명칭에서부터 서로 적대적 위치에 섰던 사람과 세력 간의 화해와 상생, 미국(미군)의 책임 규명 등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미완의 과제들이 앞에 놓여 있다.
4·3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성찰이야말로 오늘의 제주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게 시민 4·3아카데미를 수료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20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