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브랜드 인플레이션 시대에 도시브랜드란 무엇인지 살펴보고, 도시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브랜드 마케팅 활동에 대한 국내·외 사례를 살펴보고자 <오마이시티, 오마이브랜드> 기획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인천광역시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도시브랜딩 활동의 기획·진행·평가 등을 짚어보면서 도시경쟁력 강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천시 브랜드전략팀장이었던 박상희 경희대 시각디자인과 교수와 이한기 <오마이뉴스> 기획취재 선임기자가 함께 진행한다.[편집자말] |
부산 대평동은 자갈치시장 건너편, 영도·남항대교와 맞닿은 곳에 자리잡은 버선 모양을 닮은 마을이다. 대평동은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찬 형세'라는 뜻을 지닌 '풍발포(風發浦)'라고도 불렸다. 이곳은 영도와 함께 해항(海港)도시 부산을 있게 한 자연방파제 같은 곳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대풍포(待風浦)'라고도 불렸다. 해방 이후에는 풍랑 없이 평안을 비는 의미로 '대평동(大平洞)'이 되었다.
구한말 부산으로 건너온 일본 어민들이 모여살았던 대평동은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조선소'를 비롯해 여러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이곳에는 해방 이전까지 수리조선소와 조선 관련업체가 60곳 가량 들어섰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대평동은 1970~80년대 수리조선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후 원양어업이 활황세를 띄며 대평동은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깡깡깡'. 수리조선소 담장을 넘어 마을 전역에 울려 퍼지던 망치소리. 뱃전에 붙은 녹과 조개류를 떼어내는 망치소리. 가족의 생계를 건사한 깡깡이아지매의 망치소리. 깡깡이아지매는 자갈치아지매, 재칫국(재첩국)아지매와 더불어 부산의 '3대 아지매'로 불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시대까지 억척스럽게 가족의 삶을 지켜왔던 여성들이다.
선박을 수리하기 전, 배의 외관에 붙어있는 조개껍질이나 녹슨 부분을 벗겨내기 위한 작업 소리 '깡깡깡'은 대평동을 번영시켰던 소리다. 아파트 4, 5층 높이의 거대한 배에서 청력을 잃거나, 몸을 상해가며 가족을 건사했던 가난했던 어머니의 애환을 상징한다. 시간이 흐른 지금, '깡깡깡'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대평동의 고유한 역사와 자부심을 불어넣는 상징적인 단어가 됐다.
부산 '깡깡이예술마을'은 제2의 감천마을
부산시는 제2의 감천문화마을을 목표로 예술상상마을 사업 공모를 추진했다. 깡깡이예술마을이 선사하는 풍광과 독특한 정취에 감탄한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의 문화기획자들이 공모에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평동마을회, 영도구청, 영도문화원이 함께 힘을 모았다. '깡깡이예술마을'은 2015년 8월 예술상상마을 사업 공모에 대평동이 최종 선정되면서 탄생했다.
깡깡이예술마을은 해양문화수도를 목표로 삼으며 영도 도선(나룻배) 복원, 퍼블릭 아트, 마을박물관, 문화사랑방', 공공예술페스티벌, 깡깡이크리에이티브 등 6개의 핵심사업과 19개의 세부사업을 통한 도시재생을 진행하고 있다. 깡깡이예술마을에는 소금, 성냥, 해산물, 솥, 로프(줄), 간장, 양조, 레코드, 석유 등 9가지 특산물도 있다.
깡깡이예술마을사업단은 마을회 사람들, 식당 주인, 공업사 사장, 깡깡이아지매 등 다양한 마을의 구성원들을 인터뷰하고 도시재생의 밑그림을 그렸다. 우리나라 근대조선산업의 발상지라는 역사성과 부산의 문화 원형을 바탕으로 마을브랜드를 개발했다.
'바다를 건넌 사람들, 산을 오른 사람들', '북항과는 차별화된 남항의 재창조', '원도심과 절영도를 연결하는 관문'이라는 세 가지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 이를 방향타 삼아 해양, 재생, 커뮤니티 중심의 항구도시 부산의 원형 재창조라는 비전을 바탕으로 예술상상마을을 구현하고자 했다.
영도문화원 사무국장인 김두진 깡깡이예술마을사업단장은 "마을은 사업 단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곳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장소"라고 강조한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상임이사인 이승욱 예술감독은 "깡깡이예술마을 프로젝트는 오래된 것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시도"라면서 "오래된 것은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전통과 문화에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문화예술을 통해 이 지역의 역사와 삶을 기록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 깡깡이예술마을"이라고 덧붙였다.
영도구청은 사업예산 관리·운영, 기관 협력과 행적 지원을 담당했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은 사업을 기획·진행하는 한편, 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했다. 대평동마을회는 주민 대표로서 마을공동 재산을 직접 관리·운영하고, 마을해설사를 통해 외부 방문객들에게 마을을 소개하고 알렸다. 영도문화원은 산업예산 분배와 관리 추진협의회를 맡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대평동마을회다. 마을회는 그들이 보유한 마을 자산이 있다. 바로 깡깡이 생활문화센터다. 이는 대평동 주민들의 공동 자산이다. 이 공간은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주차장이 됐을 공간이라고 한다. 이사를 가면 마을회원 자격이 박탈되고, 이사를 와도 10년이 지나야 마을회원 자격이 생긴다는 대평동마을회. 마을회의 존재는 대평동이 공동체성을 잃지 않고, 주민 주도의 도시재생 사업을 이뤄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소설 <탁류>의 배경인 군산 '째보선창'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옹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 보이게 선창가를 빡빡이 들이 밀렸다. 칠산바다에서 잡아가지고 들어온 젓조기가 한창이다... 마도로스의 정취는 없어도 항구는 분주하다."
군산이란 항구를 무대로 타락한 인물들의 삶을 예리하게 들여다본 소설 <탁류(濁流)>에서 채만식이 군산 선창의 풍경을 묘사한 글이다. <탁류>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일제강점기 치하 민초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탁류>의 배경 무대인 '째보선창'은 옥구군 북면 죽성리에 속했던 '죽성포'를 가리킨다. 큰 대나무숲이 서쪽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준다고 해서 대나무 '죽(竹)'에 성곽 '성(城)'자를 써서 죽성포(竹城浦)라 불렀다.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서해안의 주요한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이 '째보선창'이 된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포구의 안쪽이 'Y'자로 살짝 째진 모습이 째보(언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는 게 대표적이다. 또다른 하나는, 옛날 이 선창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그가 이 포구의 상권을 장악하고 날품을 팔거나 노점을 차린 사람들에게 자릿세를 받으며 상권을 장악해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군산시는 서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1899년에 개항했다. 일제강점기 때 미곡(米穀)의 최대 생산지였던 김제와 만경평야 등에서 수탈한 곡식을 실어나르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개항 이후 군산의 내항은 항구도시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물류를 위한 경제·행정 관련 산업시설이 갖춰졌다. 일제 수탈의 역사이자, 동시에 근대도시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째보선창은 조선시대 때는 군산창포구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개항 이후 일본의 군산항 활용 계획으로 '군산창포구'에서 '군산내항'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일본의 통제 아래 일반어선의 출입이 금지되고 화물선이 정박하는 관용항구로 변모했다. 군산 인근의 모든 어선들이 내항 바로 옆에 자리잡은 죽성포구를 이용하게 되면서 째보선창은 군산 최고의 민간 포구가 됐다.
1990년 금강하굿둑 완공과 함께 군산 내항은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 여파로 인구가 줄어들고 상권이 쇠퇴하면서 도심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근대역사유산 보존과 활용을 통한 군산시 도시재생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2005년 근대역사문화경관 가꾸기 사업, 2009년 문화도시 조성사업과 지역 근대산업유산 예술 창작벨트화 시범사업, 2018년 도시재생 뉴딜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군산 '째보스토리 1899'의 탄생 배경
근대항구도시 군산은 전통산업이 쇠퇴하고 지역경제를 지탱하던 조선업의 잇단 폐업으로 인해 도시 경제는 침체기를 겪었다. 새로운 전환점이 절실했던 군산시는 근대항구도시로서의 도시 정체성을 간직한 째보선창의 역사적 상징성을 수복하고자 노력했다.
기존 산업의 쇠퇴로 유휴공간이 발생했다. 군산시는 이를 거점으로 삼아 관광자원을 활성화하는 한편 경제기반을 만들고자 했다. 수변 공간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해양관광 연계 사업, 그리고 폐선부지와 폐창고를 활용한 관광산업과 주변 숙박환경 조성이 대표적이다. 이와 더불어 도시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주민 역량을 강화해 도시의 자생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독특한 근대건축물의 복원과 활용이 이뤄졌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하나로 군산시 금암동 소재 옛 수협창고는 리모델링을 통해 군산 '째보스토리 1899'로 다시금 탄생했다. 1층은 수제맥주 가공, 체험장과 영업장, 2·3층은 문화예술 콘텐츠 창작·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군산시의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평가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군산시는 관광 정책 위주의 도시재생사업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지역경제 활성화는 도모했다. 이는 거꾸로 일제강점기 시절 수탈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기보다는 아픈 역사의 공간을 드라마 세트장처럼 조성해 거주민과 그들의 생활공간이 관광객들의 피사체가 됐다는 지적도 있다.
역사문화 환경은 역사적 유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시대상, 사회적 관계, 사람 간의 관계 등이 오랜시간 쌓여 지역의 고유문화를 이루는 것이다. 단순히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적 의미가 부여된 장소로 변화된 도시 정체성을 형성하는 유·무형의 자산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도시재생은 그 공간을 살아가는 거주민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어야 한다. 거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쇠퇴한 도시는 활성화 하며, 변화된 환경과 거주민이 공존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존재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의 혼란과 혼탁했던 시대상을 '탁하게 흐르는 강물'이라는 뜻의 '탁류'로 표현한 것은 군산의 아픈 역사를 은유한 것이다. 빠르게 진행된 도시화, 잊혀진 역사, 지속된 삶, 도시의 부흥과 쇠락, 이 모든 것은 도시가 자라는 과정이다. 우리는 경제적 논리와 관료주의로 도시를 만들거나 바꿀 수 없다. 도시는 자생적 시스템을 가진 생명체와 같다. 사람, 문화, 역사 등이 함께 살아지고, 살아내는 공간이다. 도시가 스스로 지난한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구성원들의 상생 체계가 필요하다.
인천 '괭이부리마을' 도시재생의 비결
괭이부리마을은 6·25전쟁 이후 황해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정착한 쪽방촌에서 시작됐다. 괭이부리마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만석부두에 '묘도(猫島)'라고 불렸던 섬이 있었는데 이 마을의 서쪽에 있는 산이 고양이처럼 생겨서라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06년 이 일대를 매립하기 시작한 일제가 간척사업을 진행해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 어떤 설이 더 일리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인천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은 만석부두 인근에 위치해있다. 만석부두는 1960~1970년대 인천을 대표했던 부두로 영종도를 오가는 여객선과 어선들로 장사진을 치던 곳이다. 어업이 크게 발달했지만, 인천 연안부두가 발달하며 이곳의 어업 비중은 줄어들고 철강 등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현재 괭이부리마을에는 인천시 사회적기업 '해맑은 김치공장'과 '굴막공동작업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거주민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한다. 지자체, 지역 기업, 거주민 간의 상생은 쪽방촌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했던 괭이부리마을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기존 원도심 개발 사업이 노후된 건축물의 재개발 위주로 진행되었다면, 이 사업은 마을만들기 운동 차원의 사업과 연계한 재생운동으로 진행됐다. 도로명 주소로 화도진로 186번길이 괭이부리마을이다.
괭이부리마을은 MBC <느낌표> 선정도서로 큰 관심을 모았던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이라는 장편동화로 유명해졌다. 김중미 작가가 1987년부터 인천시 만석동 쪽방촌에서 살면서 지역민과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썼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김 작가는 현재 강화도에 거주하며 괭이부리마을 어린이 공부방인 '기차길 옆 작은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괭이부리마을 재생의 중심 축은 '희망키움터'다. 지역민의 가내수공업이 가능한 공간과 우리미술관 교육관이 있다. 2015년 개관한 우리미술관은 괭이부리마을 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서 거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도모하는 공간이다. 주민의 참여로 이루어진 우리미술관 개관 전시에서는 작가 참여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동네 어르신과 아이들이 직접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
괭이부리마을에는 흔히 말하는 잘된 도시재생 사례라고 손꼽을 만큼 그럴싸한 랜드마크가 없다. 반듯하게 정비된 주거 환경도 없다. 지역경제를 활성화 할 경제모델도 없다. 그러나 괭이부리마을은 빈민촌이나 쪽방촌이라 불리는 공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무질서함은 없다.
소소한 골목길은 깨끗하게 청소돼 있고, 거대한 랜드마크는 없지만 지역민을 포용하는 작은 미술관과 쉼터가 있다. 유명한 사립학교는 없지만 어린이를 사랑하는 교사가 만든 작은 학교는 있다. 유원지에서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의 웃음은 없지만, 골목길을 점령한 어린이들의 웃음이 있다.
지역의 정체성과 '브랜드 네임'
도시, 지역 그리고 골목길은 인위적으로 꾸며지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이 살아지고 살아내는 공간이다. 도시재생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공간이 아닌, 그 공간을 살아낼 사람들이 살아지게 만드는 공간을 지향해야 한다.
도시재생의 성공 여부는 규모나 경제성 측면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맞는 장소성을 얼마나 잘 복원하고 간직하느냐에 달려있다. 도시재생에 성공한 국내·외 사례를 보면, 그 장소를 부르는 그들만의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괭이부리마을, 째보선창, 깡깡이예술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애정은 그 공간을 지켜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지역의 정체성이다. 지역 이름은 그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브랜드 네임'이다. 그 이름에는 지역의 가치·비전·목표 등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함축돼 있다. 이 고유한 이름이 가진 힘은 단순히 친근하게 부르기 쉽고 기억되기 쉽다는 것을 넘어선다. 지역의 고유한 이름은 내·외부와 소통하기 위한 기초적이고 중요한 수단이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을 담을 수 있다.
첫째, 주민과 외부 이해관계자가 지역의 가치를 통합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둘째, 관광객·투자자에게 지역의 비전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셋째,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비교우위의 요소를 담을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미래적 가치(지향하는 가치과 비전), 현재적 가치(라이프 스타일), 역사적 가치(고유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도시브랜드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와 같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지역의 정체성과 위에 언급한 세 가지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소통체계가 중요하다. '물리적 공진화'나 '감성적 공진화(소통의 진화)' 모두 공간, 사람, 문화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진화(共進化)'는 생물 집단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다른 생물 집단에 영향을 미쳐 상호관계를 통해 함께 진화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