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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면에 한 요사(妖邪)한 자가 있어 민간에 왕래하면서 스스로 신령(神靈)이라 일컫고, 도당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있는데, 이런 말이 경외에 전파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8월 1일 신축 1번째 기사


반월성에서 바라본 포천시내 반월성에서 바라본 포천시내의 전경이다. 포천은 송우 도고라 불리는 상인집단들이 주름잡았던 상인의 도시이기도 했고, 궁예이후 미륵신앙이 번지기도 했다.
반월성에서 바라본 포천시내반월성에서 바라본 포천시내의 전경이다. 포천은 송우 도고라 불리는 상인집단들이 주름잡았던 상인의 도시이기도 했고, 궁예이후 미륵신앙이 번지기도 했다. ⓒ 운민
 
때는 조선 후기, 숙종 임금이 다스린 지 14년째 되는 해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전국을 사정없이 내리쬐던 8월 포천, 양주 일대에서 자신을 미륵 삼존이라 칭하고 열심히 사상을 전파하던 땡중이 있었다. 본래 강원도 통천의 야심만만한 승려였던 여환은 신분 차별이 없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열심히 미륵을 설파했다.

"석가모니의 운수는 끝났으니 이제 미륵이 새로운 세상을 주관한다." 마침 전국에 전염병이 성행하여 한성과 지방에서 죽은 자가 거의 1만 명에 달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여기 포천 땅에서 이어져간 미륵신앙의 전통은 그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땡중 여환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세력을 키우기 위해 물을 다스리던 용신을 모셨던 무녀 원향과 결혼했다. 그의 밑엔 어느새 지관 황회, 평민 정원태를 비롯한 수많은 추종자들이 점차 모아졌다. 여환은 7월엔 비가 크게 쏟아지고 그 재난으로 인해 한성은 크게 혼란해질 것이다를 예언하면서 그 틈을 타 병사를 이끌고 대궐을 쳐들어가 왕의 목을 베서 미륵의 세상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제 여환은 참모들을 이끌고 북한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비가 오길 기대하며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했는지 큰비는 오지 않았고,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여환을 비롯한 신도 50명은 체포되었고, 세상을 뒤엎길 바랬던 땡중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포천은 우리들에게 어떤 도시일까? 포천의 이동막걸리, 이동갈비는 고장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유명하고, 군부대가 다수 위치한 군사도시로도 기억될지도 모른다. 혹자는 산정호수와 백운계곡으로 대표되는 한여름 피서지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포천은 남부의 안성과 함께 과거에 번성했던 경기도의 도시라고 손꼽을 만했다.

서울에서 금강산을 거쳐 원산, 함흥으로 이어지는 경흥대로의 중간 지점으로 원산에서 잡은 어류들이 포천에 집결했다가 서울로 유통되는 송우장이 있었다. 포촌의 최남단 소홀읍을 거점으로 송우 도고라 불리는 상인 집단이 활약했는데, 원산과 강원도 어류를 포획하는 생산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지금의 도매상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었다.     

한반도 중부내륙에 위치하고 남북 이동의 주요 경유지로서 번영했던 포천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여환의 난의 배경이 되었던 미륵사상의 요람이기도 하다. 시계를 잠시 앞으로 돌려서 궁예가 다스리던 후삼국시대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때 포천의 명칭은 견성군으로 철원과 함께 발해를 견제하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신라 말기, 전국에서 호족들이 들고일어나면서 혼란스러울 시절, 궁예라는 승려 출신의 장군이 고구려 부흥을 자처하고 901년 송악에서 후 고구려를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천은 역사의 변방에서 그저 조용한 고을 중 하나였다. 하지만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뀌면서 포천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갔다. 
 
명성산에 있는 궁예의 침전바위 명성산 주위에는 궁예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이 전해져 내린다. 명성산의 궁예봉에는 궁예가 앉았다는 침전바위가 남아있다.
명성산에 있는 궁예의 침전바위명성산 주위에는 궁예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이 전해져 내린다. 명성산의 궁예봉에는 궁예가 앉았다는 침전바위가 남아있다. ⓒ 운민
       
궁예는 호족 집단의 견제를 뿌리치고 중앙집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일명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성 불교 종단의 반감은 물론 왕건을 비롯한 패서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들의 쿠데타로 인해 궁예는 왕의 자리에 쫓겨나고 곧바로 백성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의 이야기다. 하지만 궁예는 철원의 바로 남쪽 포천으로 내려가 왕건에 대항하여 반년 동안 항쟁을 이어갔다. 현재도 포천의 산의 명칭을 살펴보면 궁예와 관련된 일화와 지명이 상당수 남아 있다.
     
궁예왕릉의 전경 지금의 북한지역에 있는 궁예왕릉이 있었다고 일제시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궁예왕릉의 전경지금의 북한지역에 있는 궁예왕릉이 있었다고 일제시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회
 
철원에서 쫓겨난 이후 궁예의 흔적을 한번 따라가 보도록 하자. 궁예는 우선 한탄강 계곡을 타고 보개산으로 내려가 잔여 세력을 이끌고 성을 쌓았다. 하지만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한 궁예는 성동리 산성까지 내려갔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궁예는 파주골을 거쳐 명성산으로 이동하면서 최후의 항쟁을 하러 이동했다고 한다.

파주골의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가 아니라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친 동네라 하여 패주동이라 불렀다가 시간이 흐르며 파주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궁예가 도망친 명성산은 지금은 억새 축제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 어느 지역에 비해 궁예와 관련된 설화가 풍부한 곳이다.      
 
궁예가 목놓아 울었던 명성산 억새축제로 유명한 명성산은 궁예와 군사들이 왕건에 쫓기면서 목놓아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란 명칭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궁예가 목놓아 울었던 명성산억새축제로 유명한 명성산은 궁예와 군사들이 왕건에 쫓기면서 목놓아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란 명칭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운민
 
명성산의 명칭의 유래도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을 포위하자 궁예를 비롯한 군사들이 산이 떠나가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해서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한 게 바로 명성산인 것이다. 산 주위에는 궁예와 관련된 일화들이 녹아들어 있는데, 망봉은 궁예가 적의 동정을 살피고 봉화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은신하던 곳이라 한다. 이후 궁예의 행적은 설화, 전설마다 서로 엇갈린다. 포천에 위치한 또 하나의 명산, 운악산에는 궁예 궁궐 터가 있는데 거기서 최후까지 항전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명성산에서 탈출한 궁예는 철원 너머 평강, 김화 땅까지 올라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원도 김화 부근 세포군에서 궁예는 이 자리에서 죽게 되고, 왕건은 최대한 예우하여 유해를 모시고 가려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바로 돌을 쌓아서 왕릉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육당 최남선의 저서 <풍악기유>에도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도 궁예 왕릉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는 북한 땅이라 가볼 수 없지만 보존이 잘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궁예가 포천 땅에서 진한 흔적을 남긴 이후 미륵신앙이 고을 곳곳에 스며들었고, 조정에 대해 종종 반기를 드는 반골의 땅이 되었다.
 
궁예가 최후의 항쟁을 펼쳤다는 운악산 경기 오악의 하나고, 100대 명산에 속해있는 운악산에는 명성산에서 밀려난 궁예 세력들이 최후까지 항쟁을 펼쳤다고 전해져 온다.
궁예가 최후의 항쟁을 펼쳤다는 운악산경기 오악의 하나고, 100대 명산에 속해있는 운악산에는 명성산에서 밀려난 궁예 세력들이 최후까지 항쟁을 펼쳤다고 전해져 온다. ⓒ 운민
 
918년 궁예가 쫓겨나고, 923년이 되어서야 포천 지역의 유력 호족인 성달이 귀부 했을 정도로 이 지역의 궁예에 대한 민심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미륵불의 흔적을 동네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데 포천시내에서 가까운 반월성 쪽에 구읍리 미륵불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전통을 바탕으로 여환이란 승려가 미륵을 외치며 세상을 뒤엎을 꿈을 꾸었음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미 여환의 난이 있기 전 1674년에 포천 지역에 살던 노비 전석이 상전을 살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되어 포천읍이 일시적으로 혁파되었고, 당시 현감이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런 포천의 남다른 기질 덕분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는 발전이 다소 늦어지게 되었지만, 2028년 지하철 7호선이 포천까지 들어오게 된다면 새롭게 포천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게 될 것이다.

포천을 아직 제대로 소개하지도 못했는데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이 도시가 가진 콘텐츠가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포천의 시내 주변에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여러분과 함께 포천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을 함께 파헤쳐보기로 하자.          

덧붙이는 글 | 9월초, 오마이뉴스에서 연재하고 있는 경기별곡의 첫번째 시리즈가 책으로 나옵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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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팟케스트 <여기저기거기>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obs라디오<굿모닝obs>고정출연, 경기별곡 시리즈 3권, 인조이홍콩의 저자입니다.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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