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2년 차를 지나며 집안의 여러 곳을 정리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답답한 집안을 바꿔보고자 시작했고 변화되는 모습에 만족하며 조금씩 꾸준히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정리해야 할 곳이 많지만 조금씩 비움을 실천했다. 여전히 버려야 할 욕심은 넘치게 많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비우니 눈이 시원했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집안의 빈 공간이 마음의 공간인 것처럼 마음도 넉넉해졌다. 차츰 범위를 넓혀 이참에 환경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볼까 하여 사는 것도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자제했고 쓸데 없는 지출도 줄여갔다. 집이 비워지며 비움의 효용이나 가치에 대해 한참 알아가던 중이었다.
플라스틱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대량으로 주문하던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는 세제나 샴푸 등도 주문을 멈췄다. 빈 용기를 가져가면 채워올 수 있다는 상점에서 세제를 사오거나 바 형태의 샴푸나 세제로 바꾸려고 시도했고, 되도록이면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제로 웨이스트도 빼놓을 수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장보기를 시도했고, 냉장고에서 잠자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신경썼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김치냉장고의 고장과 폐기 이후로 1년이 넘게 냉장고 하나만을 사용했지만, 공간이 여유가 있었다. 먹을 만큼만 사고, 음식도 먹을 만큼만 하니 음식물 쓰레기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나름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어디가면 환경운동가는 아니어도 환경을 지키려고 신경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에 닥친 위기
그러던 중에 남편의 암 발병, 수술, 그리고 수술 환자의 치료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무엇보다 그것까지 신경 쓰고서는 하루를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매끼 환자용 식사를 챙기고 식사 중간에 간식, 과일 등을 사고 챙기고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 차리자!'를 되뇌며 뛰어다녀야 했다.
죽에서 진밥으로 이어진 식사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환자가 아닌 다른 가족을 위한 식사는 따로 챙기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러다 가끔씩 너무하다 싶을 때 '맵단짠(맵고 달고 짠)'의 자극적인 음식을 아이들에게 선사했다. 끼니 준비하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고 힘들 수 있다는, 아주 찐(?)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름 신경쓰던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 제로 웨이스트나 플라스틱 등의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기는 멀찍이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당연한 거리두기였지만 당황스러움은 있었다. 처음 상황을 직면한 것은 퇴원 후 3일이 지나 죽집에서 죽을 사 왔을 때였다. 일회용품이 무려 7종류, 뚜껑까지 모두 12개가 나왔다. 말문이 막혔고, 다음 주문에서는 먹지 않는 것이나 일회용 수저는 사양했다. 그럼에도 플라스틱 쓰레기는 쌓였다.
암환자의 단백질 등의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대용식은 병원의 조언을 받아 일찌감치 대량 주문했다. 암환자의 식후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는 과일 젤리도 병원에서 식사로 나왔던 것과 같은 것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모두 일회용 용기에 담겨 있다. 외에 요거트 등의 유제품과 환자가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샀다. 모두가 먹기 좋게 하나씩 일회용 용기에 포장되어 있다. 매일 플라스틱이 나왔고 일주일이 지나니 플라스틱 용기가 분리수거통에 가득 차고 넘쳤다.
모든 쓰레기 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나름 환경을 생각한다고 하는 사람의 자부심이었는데,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쓰는 것은 마음의 사치다. 그럼에도 처음엔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다. 계속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방법을 찾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몸이 건강하고 가정이 편안해야 환경도 보이고 비움도 실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집안에 환자를 두고 환경이 먼저일 수는 없었다.
종양을 제거하고 3주가 되어가고 있다. 잘 먹지 못하는 환자를 자극할 것 같아 환자가 필요한 것 이외의 일체의 외부 식사는 집에 들이지 않고 있다. 빨갛고 먹음직스러운 김치도 자제하고 있고, MSG의 최강자 라면도, 튀긴 것은 신발도 맛있다지만 튀긴 음식도 당연히 금지다.
혹시나 싶어 음식 종류를 생각날 때마다 메모했다가 병원 영양사에게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다. 늘 하던대로 자극을 최소한으로 줄인 저잔사식이(低殘渣食餌, 체내에서 흡수가 잘되어 장내에 잔류하거나 체외로 배설되는 성분이 매우 적은 음식), 고단백 식단을 6주는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환경을 위한 노력을 못하는 이유가 환자의 식사 준비 때문이라는 것은 사실 핑계일지도 모른다. 환경에 대해 어설프고 아는 것 없고 실천도 체계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었던 것처럼, 환자를 위한 돌봄 역시 비슷하다. 몇 가지 안 되는 것으로 돌려막기, 어설프게 시도하다 내가 먹기에도 영 아닌 것 상에 올리기, 뻔한 색감의 뻔한 밥상 차리기 등. 이렇게 하다보니 환자는 억지로라도 먹어주던 것도 어려운지 금세 수저를 놓고 만다. 상황이 이런데 환경은 무슨.
포기는 안 합니다, 할 수 있는 걸 하고 삽니다
이래저래 암을 이기는 것은 온 가족의 숙제가 되었다. 당사자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암을 이기기 위해 가족도 같은 과정을 밟는다. 누구 하나 지친 내색을 하면 서로가 서운해지고 모두가 힘들어진다.
모든 음식을 집에서 해결하다보니 무더운 여름이 가스불 앞에서 더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에어컨을 자주 켜는 집은 아니지만, 어쩌다 틀면 마치 보고 있던 것처럼 관리실에서 곧바로 방송이 나온다. 변압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바로 끈다. 강제지만 환경은 이렇게도 지켜진다.
피아니스트이자 현대음악가로 미국 뉴욕에서 주로 활동해온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69)라는 이도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한다. 그는 1987년 상영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음악 감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고, 영화 <남한산성>(2017)의 음악을 맡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그도 암 앞에서는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모든 것은 무상하다."(사카모토 류이치, 2021.07.16.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말처럼 자연은 흔들림없고 견고하다. 자연이, 환경이 내가 잠시 어찌한다고 크게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 모든 것은 무상하고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말이 비빌 언덕이 되어 준다.
환경 또한 거대한 흐름이고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지극히 적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실천해 온 제로웨이스트나 비움 등의 환경적 실천까지 모두 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괜히 '환경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라는 묵직한 주제를 떠올리며 변명만 구구하게 할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지금 나오는 플라스틱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다른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볼 수밖에. 때마침 주문했던 샴푸바가 도착했다. 플라스틱이 아닌 것이.
그래, 내가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종이가 아닌 비닐 봉지에 쌓여 온 것은 좀 아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