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할 때 그의 나이 23세의 청년이었다. 1916년이니 나라 망한지 어느덧 6년차가 되었다. 일본에서 보낸 3년여 동안에 학업도 충실했지만 보고 듣고 느낀 바가 많았다. 그만큼 성숙해졌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선 가혹한 무단통치를 자행했으나 자국에서는 이른바 메이지 데모크라시라 해서 어느 정도 정치ㆍ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미국 등 서양의 문화와 제도가 소개되고 국제정세도 알려졌다. 그러다보니 국제사회에 대한 안목이 트이고 참담한 고국의 실정과 비교되는 아픔이 따랐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 보다 선진과학문명을 현지에서 배우고, 무엇보다 조선을 병탄하여 온갖 살상과 약탈을 일삼는 일제의 만행을 미국인들과 세계각국에 폭로하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비용이 문제였다.
유학비를 벌고자 서울중동학교 교장 최규동의 초청으로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로 하였다. 월급을 받아 뱃삯만 마련되면 떠날 생각이었다. 경영이 어려웠던지 반년이 지나도록 보수 한푼도 없었다. 유학 여비는 커녕 생활이 어렵게 되자, 때마침 천도교 계열인 보성법률상업학교의 초청을 받아 옮겼다.
국내에는 대학이 없었고 그나마 여기가 한국인이 세운 유일한 전문학교였다.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일인들의 전문학교보다 우수한 교육기관으로 만들겠다는 야심도 생겼다.
비교헌법ㆍ국제공법ㆍ재정학 등을 맡아 가르쳤다. 교수보다 나이 많은 학생이 있는 등 교육환경이 어지러웠으나 성심을 다했다. 함께한 교수는 가인 김병로와 고우 최린이 있었다.
"스물 세 살의 혈기방장한 청년기에 있었던 나는 일본 정치 아래서 학대받고 사는 이 나라의 생활에 견디기 어려워 허구한 날 술집에 다니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소산시키려 하였다." (주석 1)
김병로와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일제강점기 허헌ㆍ이인과 더불어 독립운동가 변론을 맡은 민족변호사로서 지절을 지켰다. 해방 후 정부수립에는 함께 참여하고 그가 사법부 수장이 되었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는 등 초기의 애국심을 지키지 못한 채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신익희는 해방 후 국회의장의 신분으로 1953년 3월 보성전문학교의 후신인 고려대학 졸업식에 참석, 축사하면서 30여 년 전 교수시절을 돌이켰다.
"나는 30여 년 전 20여 세의 다정다감한 청년시대를 귀 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보내다가 3ㆍ1운동에 참여한 관계로 해외로 망명한 지 30여 년 만에 이제 다시 돌아와서 귀교와 또는 여러분들을 대하게 되니, 마치 제3의 모교와 같이 정다움을 느끼면서 금후 더욱 여러분의 불휴(不休)의 전진 및 분투를 여는 바입니다."(『고려대학교 70년지』, 65쪽)
20대의 젊은 교수로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고 강의 중에 성향상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내용이 섞여 나왔다. 소문이 나고 왜경이 나와서 참관했으나 그의 논리정연한 강의에 시비를 붙기 어려웠다. 매수 공작도 나타났다.
심지어 교수들의 강의를 점검하고자 파견된 일제의 시학관(視學官) 조차도 해공의 논리정연하고 참신한 강의를 듣고는 과연 명교수라 칭하며 찬탄해 마지않았다. 또한 일제 당국에서는 해공이 민족의식이 뛰어나고 재능 또한 겸비했음을 간파하고는 그를 회유하려 온갖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인들이 세운 경성전수학교의 주임 교수로 오라 회유하기도 했고, 관리 생활에 뜻이 있으면, 도지사로 임명하겠다고 유혹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했다. (주석 2)
1917년 딸 정완(貞婉)에 이어 1년 뒤 아들 하균(河均)이가 태어났다. 파란곡절의 생애 중 보성전문학교 교수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되고 가정적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짧았다.
질풍노도가 그 개인과 민족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석
1> 「구술 해공 자서전」, 앞의 책, 59쪽.
2> 유치송, 앞의 책, 13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