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는 장덕수를 통해 상하이 신한청년당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향후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만주와 중국관내에서 활동중인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일본에서는 '조선학회'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는 종교단체를 구심적으로 거족적인 항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를 지속적으로, 무장항쟁으로 연결하고자 그는 1918년 11월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 만주 동삼성으로 떠났다.
만주 길림성 왕청현에 본영을 둔 중광단이 중심이 되어 1918년 11월 14일 조소앙이 기초하고 해외독립운동지도자 39인이 서명한 '육탄혈전'의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이 선포되고 있었다. 길림에서 이들을 격려한 신익희는 살을 에이는 듯한 대륙의 추위를 견디며 남경을 거쳐 상하이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독립지사들을 만나 격려하고 국내의 소식을 전했다.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도쿄에서 학우들의 2ㆍ8독립선언 소식이 중국신문에 보도되었다. 여운형을 비롯하여 신한혁명당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숙의하였다. 방략 중에는 국내에 거대한 조직망을 갖고 국민의 신뢰가 높은 손병희를 모셔다 독립운동기구를 구성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2ㆍ8에 이어 곧 거사할 것으로 기대했던 국내의 봉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상주(喪主)의 복색을 하고 1919년 2월말 귀국길에 올랐다.
만주에서 처음으로 3ㆍ1혁명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행 기차에서 평양시민들의 독립만세 시위행렬을 지켜보게 되었다.
나는 이 날 기차 편으로 평양을 지나다가 평양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정거장을 향하여 돌진하는 군중의 시위 행렬을 보고 "아하,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절규는 터지고 말았구나!" 생각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내가 본국으로 들어온 이유는 동북 만주를 위시하여 북경ㆍ상해까지 두루 돌아본 결과 내심 작정하기를, 국내에서 민중 동원의 기반을 가진 손병희를 해외로 데려가 내외 호응으로 줄기찬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과 천도교당 건축비로 모아 놓은 헌금(獻金)을 해외로 내다가 군사 자금에 쓰려 했는데, 들어와 보니 손병희는 벌써 일본 경찰에 잡혔고, 천도교의 헌금도 지니고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석 6)
국내의 3ㆍ1혁명 봉기는 일제의 살인ㆍ방화ㆍ강간 등 야수적인 진압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파업, 관리는 퇴직으로 적극 참여했다. 기생과 백정 등 천민으로 괄시받던 사람들도 앞장서고, 남녀ㆍ신분ㆍ노소ㆍ출신을 가리지 않고 참여한 것이다. 세계혁명사에 초유의 일이다.
3ㆍ1혁명 이후 시위 상황을 보면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탄교회 47개소, 학교 20개ㆍ민가 715채이다. 실제 피해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3ㆍ1혁명을 주도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당일 총독부에 구속되어 혹독한 조사와 고문을 받았다. 변장을 하고 입경한 신익희는 3월 4일 서울에서 제2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제자들과 은신처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제2차 서울의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때 나의 제자로 있던 보성법률상업학교의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생 한창환(韓昌桓) 등에게 연락해서 3월 4일에 남대문 정거장 곧 지금의 서울역에서 시내로 돌진하는 4, 5백 명의 제2차 시위 행렬을 진두지휘하고, 3월 14일의 국장(國葬)을 빙자하여 백립(白笠)해 남바위 받쳐 쓰고 곰방대를 들고 농사 짓는 시골 사람 행세를 하여 점점의 눈을 피해서 용산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신의주를 넘어 봉천을 합하여 그 달 19일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후로 나의 해외 망명지의 해외 생활이 시작되었다. (주석 7)
주석
6> 앞의 책, 62쪽.
7> 앞의 책, 6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