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1등급이 인생 1등급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전교 1등의 고백이다.
그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전 과목 내신 1등급이었다. "단 한 과목이라도 2등급이 나오면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단다. 목표는 서울대 문과 '최고의 학부' 합격. 그래서 옆을 볼 자유를 누릴 여유도 용기도 없었다.
2015년 그는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첫 학기부터 공허감이 밀려왔어요. 4년 내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동윤(26)씨. 그는 지금 졸업을 앞둔 4학년이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바랐던 '전교 1등, 서울대 경제학부 합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도 그는 왜 대학생활 내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유튜브 <오연호의 꿈틀리마을>에서 자신의 방황과 불행을 이야기했다. "다시는 나와 같은 후배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다. 학부모들에게도 당부했다. "자녀의 학업 코치가 되기보다는 정서적 지지자가 되어 주세요."
다음은 인터뷰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옆을 볼 자유
-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는데 왜 지난 4년간 그리 행복하지 않았나요?
"우선 제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라는 목표를 세웠던 것이 제 스스로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고민하고 내렸던 결정이 아니었어요. 그 타이틀 자체, 문과에서 최고의 학부를 가고 싶다라는 이 욕심 때문에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입학을 하고 보니 전공이 맞지 않았어요. 입학하고 첫 학기의 심정은 한 단어로 정리하면 카오스였죠. 고등학교 때는 '전교 1등, 서울대 합격'이라는 목표가 분명했는데, 그래서 관성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서울대 입학 후에는 에너지를 쓸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었어요."
- 에너지 쓸 곳을 잃어버렸다?
"네. 목표의 상실이 주는 좌절감, 공허감이 엄청났어요. 이대로 가다간 내 인생이 망가지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래서 개인적으로 심리상담센터를 찾아가 상담도 해봤고요, 내가 왜 목표를 달성하고도 불행한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오연호 작가님이 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도 읽어보고, 제 개인적으로도 해결을 하려고 많이 노력을 했습니다."
- 그런데 말이죠, 지금도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에만 집중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많잖아요. 심지어 초등학교 때부터.
"네. 그렇죠."
- 그런 초중고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실 제가 딱 그랬던 케이스였는데요,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부터 서울대라는 목표를 갖고 공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서울대라는 목표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자기의 고등학교 성적표가 1등급이라고 해서 자신의 대학생활 더 나아가서는 인생까지 1등급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내가 왜 공부하는지는 꼭 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서울대 합격 자체가 목표인지 아니면 진짜 그 학교나 그 과가 자신이 꾸고 있는 더 큰 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그것이 서울대든 어느 대학이든 합격 자체가 목표가 되면 대학 가서는 저처럼 방황할 수 있다는 얘기를 꼭 해드리고 싶어요."
- 지금 되돌아보면 무엇이 그렇게 전교 1등, 서울대 합격을 목표로 내몰았던 것 같아요?
"제 나이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좀 그렇지만 명예욕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서는 학생에겐 성적이 거의 명예처럼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친구, 선생님, 부모님께 인정도 받고 싶었고요. 그 욕심에 공부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 그러다 보니 '옆을 볼 자유'는 덜 했겠네요.
"옆을 볼 여유도 없었지요. 전교 1등, 서울대 합격이 정말 유일의 목표였고, 제 삶의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으니까요. 어느 다른 길로 가 볼 생각을 못 했지요. 동아리도 토론 동아리 등 서울대 합격에 필요한 것만 했습니다. 연극동아리나 밴드동아리 등에는 관심은 있었지만 해볼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그렇게 '옆을 볼 자유'를 희생시키고 얻은 서울대 합격은 그에게 방황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방황이 그에게 잃어버렸던 '옆을 볼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공부가 아닌, 학점이 아닌, '행복'에 대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부모'는 학업코치 아닌 정서적 지지자
"그 책을 읽은 건 굉장히 우연한 계기였는데요. 그때 제 동생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읽고 있는 책이라면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집에 가지고 왔어요. 어떻게 행복한 사회, 행복한 인생이 가능한가를 쓴 거잖아요. 저도 마침 한참 그런 거에 고민이 더 많았기 때문에 제목을 보자마자 꽂혀서 읽기 시작했지요."
- 나도 행복하고싶다, 아마 그런 마음이 들어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었을 텐데요.
"제가 갖고 있는 문제가 제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어보니 덴마크의 학생들은 중고등학생 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자기의 적성에 대해 알아갈 만한 여유가 있었어요. 그 여유를 사회에서 시스템적으로도 보장해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사실 중고등학교 때 왜 우린 그러지 못할까,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서울대라는 목표만 생각했으니... 그래서 책을 읽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를 내가 중고등학생 때, 10대 때 좀 더 깊게 고민을 했다면 이렇게 대학에 와서 방황하지 않았을 텐데."
-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육이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진부한 말이겠지만, 일단 가장 큰 과제는 국영수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학생들이 각자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진로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실제 사회나 산업 현장과 연계시켜서 10대 때부터 다양한 사회 체험, 직업 체험을 하게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4학년 졸업반인데요, 아직도 방황 중인가요 아니면 진로를 정했나요.
"우리 과를 다니게 되면 주로 로스쿨을 가고, 금융 관련 공기업이나 전문직으로도 가는데요. 저도 잠시 로스쿨을 준비해봤는데 남은 20대를 다시 10대처럼 공부, 공부, 공부로 보내려 하니 너무 답답하고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학교에서 하는 진로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 안에 잠재해있던 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있지요."
- 부모님은 어떤 반응이세요? 서울대 경제학부에 간 아들이 지금은 아나운서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데.
"응원 반, 걱정 반이시긴 하세요.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이니까 존중은 해주시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하시지요."
- <오연호의 꿈틀리마을> 구독자 중에는 학부모가 많습니다. '좋은 대학'을 핵심목표로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자녀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녀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자율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회의 눈치'를 보고 사회가 권하는 길을 일방적으로 따라갔기 때문에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자기주도적인 중고등학생 시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20대 초반에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도 생각합니다."
하동윤씨는 대한민국 부모들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자녀에게 학업 코치인가 정서적 지지자인가?
"이게 제일 중요한데요, 저는 부모가 자녀에게 학업코치 역할보다는 정서적 지지자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학업성적에 대해 너무 개입하고 걱정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영향이 자식한테도 안갈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자식들도 심리적으로 굳어 있고 다른 무엇에 도전하려는 용기가 안 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도 여러 가지 일에 용기 있게 도전하는 것도 힘들어지지요. 물론 부모의 눈에는 자녀들이 언제나 어리게 보이고 하는 것들이 미진해 보이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선택해서 도전해보고 하나하나 성취해가는 것을 부모가 믿음을 가지고 대견하게 바라봐주면 좋겠습니다."
- 공개적으로 이렇게 나와 가지고, 나 서울대생인데 그동안 헤맸다, 이렇게 고백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많이 고민했지요. 지금 초중고 다니는 후배들에게 제가 먼지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나왔습니다. 공부보다, 전 과목 내신 1등급보다, 전교 1등보다, 서울대 합격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후배들이 미리 알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