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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상해 황포구의 인민정부대례당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상해 황포구의 인민정부대례당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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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탄핵을 전후하여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지도력의 공백에다 파벌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안창호 등 일부에서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는 데는 국민대표회의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믿고 여기에 전력을 쏟았다. 신익희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속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정부에 건의하고, 시종 같은 입장을 견지하였다.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를 적극 추진한 데는 임시정부 내의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1920년 훈춘사건(간도참변)도 한 변수가 되었다. 3ㆍ1혁명 후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이 지역에 병력을 투입할 구실을 찾았다. 일제는 마적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하여 마적단 400여 명으로 하여금 훈춘을 습격하게 사주하였다. 이 습격으로 훈춘의 일본영사관 직원과 경찰 가족 등 일본인 9명이 살해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삼아 마적토벌이라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한인회와 독립단 조직을 파괴시켰다. 특히 독립군의 활동기반인 조선인 교포 학살에 역점을 두었으므로 훈춘에서만 250여 명의 교포가 참변을 당했다. 이 사건을 시발로 하여 일본군의 만주지역 조선인 교포 학살행위가 그치지 않게 자행되면서 독립군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벌어진 자유시참변(일명 흑하사변)도 국민대표회의 개최의 요인으로 대두되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부대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불상사였다. 이 사건으로 사망 272명, 포로 864명, 행방불명 59명 등 막대한 한인 교포의 희생이 따랐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임시정부의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으며, 결국 국민대표회의 개최로 중지를 모으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3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민국로(民國路)의 미국인 예배당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일제의 방해와 교통사정 등으로 개회 당일 참석자는 62명이었다. 대회는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각지의 대표들이 속속 참석하고 열기도 뜨거웠다.
 
회의에서는 의장에 김동삼을 선출하고 안창호와 윤해가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평균 3일에 1회 꼴로 열린 회의는 독립운동 대방략에서부터 시국문제, 국호 및 연호, 헌법, 위임통치사건 취소, 자유시참변, 통의부사건, 기관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회의는 군사ㆍ재정ㆍ외교ㆍ생계ㆍ교육ㆍ노동 등의 6개 분과로 나누고, 헌법기초위원회, 과거문제조사위원회 등 2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독립운동단체에서 부담하고, 찬조금으로 한형권이 모스크바의 레닌에게서 받아온 기금으로 충당하였는데, 이 자금문제를 둘러싸고 한때 회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회의가 계속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과 시국문제의 토론에서 각 지방과 단체, 개인 사이에 이견이 대두되었다. 대별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으로 나뉘었다.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회의는 팽팽하게 논전을 펼쳤다. 3월 20일 이후에는 정식 회의를 그만두고 비공식 접촉을 가지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공백기간이 지난 뒤 4월 11일부터 회의가 재개되었지만, 결국 다시 임시정부 처리문제로 돌아왔다. 63차 회의가 열린 5월 15일을 끝으로 더 이상 양대 세력의 활동모임은 없었다. 결렬을 눈앞에 둔 6월 4일에 안창호ㆍ손정도ㆍ정신ㆍ왕삼덕 등 개조파와 신숙ㆍ윤해 등 창조파 및 중도의 김동삼이 합석하여 타협책을 마련하느라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결렬되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국내연결망으로 들어오던 독립기금이 총독부의 탄압으로 그치고, 미주의 동포들이 보내오던 기금은 이승만이 탄핵된 뒤 그쪽에서 챙겨감으로써 임시정부는 청사운영비는 물론 중국인 직원 급여도 주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 후로의 임시정부는 재정의 근거가 없어서 극히 곤란하였다. 총장이나 서기나 사환이 똑같이 동전 팔푼으로 요기하는 양춘면(陽春麵) 반 그릇이나 빠오판(砲飯) 한 덩이로 끼니를 메꾸고 양말을 못 사서 바닥은 모두 떨어지고 발가락이 삐죽삐죽 나와 위만 남은 것을 신게 되어 나는 이것을 그 때 '발이불'이라고 하면서 웃고는 했다. (주석 1)

조국해방의 큰 뜻을 품고 참여한 임시정부의 참담한 분열상에 깊은 상처를 입은 신익희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주석
1>『구술 해공 자서전』, 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신익희#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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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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