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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 박정훈
 
임시정부는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고 1932년 상하이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충칭에 자리잡았다.     

김구는 7당, 5당의 통일작업은 실패하였으나 새로 원동지역 3당 통일회의를 열어 한국독립당을 출범시켰다. 이와 함께 하와이애국단과 하와이단합회가 해체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로 재편되었다. 하와이지부는 임시정부의 특무공작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경제적으로 많이 후원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에는 김구가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출범을 계기로 임시정부는 4월에 헌법을 개정했다. 곧 도래할 미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개편하고 국무위원회 주석을 돌아가며 하던 윤번주석제를 폐지한 대신, 주석에게 주석직 외의 대내외에 책임을 지는 권한을 부여하고, 김구를 국무회의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미일전쟁에 대비한 체제정비의 일환이다.

임시정부의 권력구조를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한 것이다.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여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최고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하였다. 또한 미국과의 외교강화를 위해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김구는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44세의 나이로 경무국장에 임명된 이후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지켜오다가 64세의 나이에 임시정부의 최고책임자인 주석에 추대되었다.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최고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의 군사권까지 맡게 된 김구는 중국정부에 한국광복군 창설에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중국정부의 협력을 바탕으로 하여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군사·조직·외교·선전·재정 등 6개항의 독립운동 방략을 설정하였다. 

임시정부 주류의 한국독립당 창당과 김구의 임시정부 주석 취임은 독립운동사에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30년대 중반 이래 느슨한 연합상태에 있던 민족주의 세력들이 하나의 통일체로 결집, 민족진영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기간세력으로 역할하면서, 임시정부의 세력기반이 크게 확대 강화된 것이다. 

또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면서 김구가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고 지도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3당통합을 주도하고 민족주의 세력이 통합을 이룬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명실공히 민족진영을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신익희는 충칭에서 한ㆍ중의 친선 도모와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사실상 한국독립운동의 후원단체 역할을 하였다. 대표는 손문의 아들이며 중국 국민정부의 입법원장인 손과(孫科)이고, 한국측에서 김규식ㆍ조소앙이 부회장, 신익희는 상무이사로서 실질적인 운영책임을 맡았다. 

카이로선언을 앞둔 1943년 11월 어느 날 한중문화협회는 한국교포에 대한 자치성(自治性)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중국 국민정부의 교육부장이며 정계의 실력자인 진입부(陳立夫)가 "조선 민족은 오랜 역사가 있으나 이미 일본에 조국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40여 년 간이나 일본의 학정 아래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민족정신이 거의 말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설령 독립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완전한 독립은 힘들 것이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신익희는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통박하였다.

우리에게는 유구한 반만 년의 역사가 있고, 숭고한 민족정신이 있으며, 고도의 문화ㆍ정치를 꽃피웠던 나라다. 한갓 외세에 밀려 그것도 40여 년에 불과한 짧디짧은 찰나에 민족의식이 소멸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천만 부당하다. "넓은 바닷물에 오물이 던져졌다고 해서 어찌 그 바다가 더러워지랴." 하며, 역사상의 줄기찬 항쟁을 예를 들어 통렬히 논박하였다.

그의 해박하고도 논리정연한 논박은 좌중을 감복시켰다. 고도의 문화인답게 그 의기를 투사한 결과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국민정부의 정계ㆍ문화계ㆍ학계의 지도자들은 숙연한 분위기에 질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1)

해방 후 환국하여 신익희는 그 때를 회고한다. 

한ㆍ중의 정계ㆍ문화계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중국 정객 진입부(陳立夫)가 "한국민족은 일본에게 나라를 뺏긴 지 40년에 민족성을 잃어서 독립을 하여도 그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고 했을 때 나는 "한국은 4천년 문화 민족으로, 40년 동안의 적의 강점 쯤으로 민족성을 잃을 리 없다."고 통렬히 논박하였다. 나의 이 신념은 지금도 변하지 않으며, 4년에 걸친 반공전(反共戰)으로 이 신념은 더욱 여실하게 전 세계에 증명되었다. (주석 2)


주석
1> 유치송, 앞의 책, 386쪽.
2> 『구술 해공 자서전』, 7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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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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