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영조가 즉위한 지 38년이 지난 임오년,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아버지 영조의 갈등은 해를 갈수록 더해지면서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고 더 나아가 그 화근을 제거해 장래가 창창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자식에게도 화가 미치는 역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됐고, 왕실의 집안일로 끝내야만 했기에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죽임당하는 일을 몸소 겪고, 그 아비를 영조가 살아있는 동안 부정해야 했던 정조. 그에겐 아마도 아버지가 평생의 큰 짐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 사도세자의 묘를 가꾸고 더 나아가 근처에 수원화성이라고 불리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자신도 아버지 옆에 묏자리를 마련했을 정도니 단순한 부자관계를 넘어선 특별함이 있다고 본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역이 있는 융건릉
이제 용주사를 나와 여기서 멀지 않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역이 있는 융건릉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두 장소 사이의 거리는 1.5km로 도보로 15분이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이 일대는 화성태안 3 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멘트를 잔뜩 실은 공사 차량이 수시로 이동하고, 아파트를 짓는 소음이 사방에 진동한다.
전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화성이지만 세계문화유산인 융건릉 앞마당까지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하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울창한 산림이 보이더니 어느새 왕릉의 정문까지 도달했다. 대다수의 조선왕릉들이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을 주는데 반해 융건릉은 나름 알려진 명군인 정조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이 꽤 많았다.
이곳은 인근 도시인 수원의 화성까지 거리가 가까운 편이다. 때문에 정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역사여행코스로 인기가 많다. 심지어 수원 시티투어 버스도 용주사와 융건릉을 거친다. 그만큼 이 지역 자체가 수원의 영향을 꽤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정문을 지나 꽤 넓은 묘역을 천천히 거닐며 융건릉을 둘러보기로 하자. 융건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져 있는 추존왕 장조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가 모셔져 있는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가 있는 건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숲을 사이에 두고 왕릉이 배치되어 있기에 가벼운 산책을 하는 마음가짐으로 묘역을 둘러보면 좋을 듯싶다. 융건릉의 입구로 바로 들어오게 되면 한옥 건물이 눈에 띄는데 바로 융릉의 재실 건물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지만 이곳의 마당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개비자나무가 있다.
원래 융릉, 예전 현륭원 시절의 재실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화성태안 3 지구와 인접한 곳이라 하고, 현재 공원 조성이 예정되어 있는 장소다. 즉 융건릉의 능역이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왕릉의 숲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렀다.
어느덧 잘 정비된 융릉 앞에 도달했다. 정조가 현륭원(예전 융릉의 명칭)을 배봉산에서 화성 땅으로 옮기면서 생전 다하지 못했던 효성을 쏟았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곤신지라고 불리는 연못으로, 드물게 원형으로 만들었다.
이제 정자각을 배경으로 합장릉 형태의 융릉이 나타난다. 사도세자는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후에 왕으로 추승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정조 시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은 형인 효장세자(후에 진종으로 추승됨)의 양자로 입적했기에 그 명분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도세자는 조선 말기 고종이 황제에 오른 뒤 정통성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추존왕으로 봉해지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현재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아버지의 압박으로 인한 정신적 광기가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그 당시 집권층인 노론과 척을 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 논란은 다음에 창경궁을 이야기할 때 자세히 다뤄보고 이제 그 아들인 정조의 능역으로 이동해 본다.
조선 왕릉은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허나, 여름에 갈 때는 필시 벌레 기피제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을 추천한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이 무성하고, 금천이 능역 곳곳을 휘감고 들어가 습한 기운을 머금고 있기에 사방에 벌레가 많다. 이 점만 유의한다면 쾌적한 답사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0분 동안 숲 속을 지나간 끝에 정조의 왕릉인 건릉에 도착했다. 조선 후기 강력한 왕권을 구사했던 왕답지 않게 융릉보다 소박한 느낌이 곳곳에서 감돈다. 정조에 대한 이야기는 경기 별곡 수원 편에서 충분히 다뤘으니 가벼운 묵념을 마지막으로 융건릉의 답사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난 찜질방
여기서 멀지 않은 장소에 요즘 꽤 핫한 미술관이 있어 겸사겸사 찾아가 보기로 한다. 본래 찜질방으로 계획되었던 건물이었지만 입지 조건의 변화로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뼈대만 남은 흉물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 건물은 밤이면 으슥해지는 분위기와 함께 도시 슬럼화의 주범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한 건축가의 결정으로 이 건물의 운명은 뒤바뀌게 되었다. 건축가는 차별화된 공간을 목표로 했기에 건물의 특성을 살려 미술관으로 변화시켰다. 맥반석 방의 뼈대는 그대로 갤러리가 되었고, 불가마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벽돌이 천장 없는 야외 갤러리 바닥에 깔렸다. 노출된 철근 콘크리트와 그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곳은 바로 '소다미술관'이라는 곳이다.
이제 화성에서 답사를 슬슬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물론 화성에서 가장 번화한 신도시인 동탄신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빼먹을 수는 없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신도시고, 독자적인 정체성이 모호하기에 언젠가 화성을 다시 다룰 일이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큰 면적과 난개발 그리고 과거의 안 좋은 여러 사건들 때문에 화성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본 화성은 경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닷가를 가지고 있고, 역사적인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잠재력 있는 도시라 할 만했다. 앞으로 5년 10년 뒤의 화성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그 몫은 차후로 남기기로 하고, 경기도의 다른 도시로 답사를 이어가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9월초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권>이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팟케스트 탁피디의 여행수다에서 경기별곡이 방영되니 많은 청취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