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가 비타협적 혁명가라면 신익희는 혁명가적 기질과 정치가적 역량을 구비한 현실론자에 속한다.
해방공간, 남북한에 미ㆍ소의 군대가 주둔한 상태에서 김구의 임정계열 주류는 시종 반탁ㆍ통일정부 수립론을 주창하였다. 이에 비해 신익희는 한반도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고자하는 보다 현실론의 입장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1946년 10월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설치했던 남조선과도민주의원을 입법의원으로 개편하여, 입법의원의 절반은 자신이 임명하고 절반은 민선토록하였다. 신익희는 서울에서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듬해(1947년) 1월 20일 개원한 입법의원은 좌우합작을 추진해온 하지 사령관의 의도대로 좌우합작파인 김규식을 의장으로 선출했으나 뒤이은 회의에서 신익희가 '반탁결의안'을 긴급발의, 통과시켰다. 입법의원을 자신의 어용기구처럼 활용하려던 하지의 의도가 복병을 만나 어긋나게 된 것이다.
그런 한편 남한 단정론이 굳혀져가면서 신익희는 현 상황에서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허상이라고 주장하고 점차 이승만의 단정론에 기울어져갔다. 1948년 2월에는 '유엔소총회'를 앞두고 입법의원에서 의원발의를 통해 "가능지역에서 총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안, 김규식 의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과시켜 유엔에 전달하였다. 이와 관련 김규식이 의장직을 사퇴하면서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참여론'으로 단정불가와 남북협상론의 김구ㆍ김규식과 노선상의 결별을 하고 독자노선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충칭에 남겨놓고 온 부인과 아들ㆍ딸이 1946년 봄에 귀국했다.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한구(漢口)를 거쳐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 화물차에 실려 40여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7세 때 어머니의 손에 끌려 고국을 떠났던 딸 정완이는 어느덧 30세의 성년이 되었다. 당시 신익희는 임정환국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해준 임시거처인 동대문 낙산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승만은 돈암장, 김구는 경교장, 김규식은 삼청장, 박헌영은 혜화장에 각각 거처가 정해졌다. 환국준비위원회가 친일재계 인물들에게서 기증받은 집이었다. 신익희는 1년여 만에 가족과 재회한 것이다.
당시 그는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반을 운영하고 국민대학 창립과 〈자유신문〉 사장, 입법의원 활동 등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942년 충칭에서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낸 바 있는 딸(정완)은 1981년 『해공 그리고 아버지』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하여튼 우리 식구들은 근 1년이나 헤어졌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 동대문 낙산장에 짐을 풀었다. 낙산 밑에 작은 대궐 같은 집이었는데 어느 유지가 아버지를 위해 빌려주신 것이었다. 몸이 여위셨던 중경때와는 달리 새로운 의욕에 불타오른 탓인지 아버지의 건강은 매우 좋으셨다. 이 무렵 아버지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주장하신 아버지는 친일분자들의 죄를 엄중히 처단해야 한다는 강경론에 대해 죄가 가볍고 앞으로 새 나라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포섭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주석 3)
국민대학 설립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면 1946년 6월에 취임한 『자유신문』 사장은 떠맡은 일이다. 해방과 함께 통제의 둑이 무너지면서 군소 언론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사회분위기를 타고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다. 『자유신문』도 그 중 하나였다.
독립운동가 정인보의 인척 정인익이 1945년 『매일신보』 출신 10여 명과 서울 중구 저동 1가 73번지에서 『자유신문』을 창간했다. 정인익은 사회 저명인사를 물색하던 중 신익희에게 사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자 경영에 책임지지 않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신문논조를 중도적인 공정언론사로 돌려놓고자 해서였다. 4년간 무보수로 일하면서 신문사 논조가 바로잡히는 것을 보고 손을 뗐다.
주석
3> 신정완, 앞의 책, 93쪽, 1981, 성진사.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