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
그는 내가 사는 이랑마을 입구에 위치한 카페 주인이자 사진작가이며 시인이다. 또 토종약초 연구가이자 발효전문가라는 직함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그의 집이기도 한 카페를 지나쳐야 하므로 자주 마주치기도 한다.
그의 카페는 '올레 산야초'로 세상에 알려졌다. 커피는 없고 대신 그가 직접 한라산 일대에서 채취한 각종 산야초를 발효시켜 만든 다양한 효소음료를 판다. 중산간 숲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특이한 카페 주인
이 올레 산야초 카페가 최근 변신을 시도했다. 사진 갤러리 카페로 새롭게 단장했다. 그가 평소에 찍은 제주도의 비경 사진을 감상하면서 효소음료를 마실 수 있게 새롭게 꾸민 것이다.
한 동네에 살고 있으니 예의상이라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다가 오늘 모처럼 시간을 내서 들렀다. 입구에서부터 카페로 들어가는 통로에 심상치 않은 솜씨의 사진들이 진열돼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벽면마다 멋진 사진들이 걸려 있다. 모니터에서는 그가 찍은 제주도의 비경과 야생화, 포구, 문화재 등 주제별로 분류한 1000여 점의 다양한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한라산 일대의 사계절 풍경을 비롯해 오름의 다양한 모습, 바다와 저녁노을, 반딧불이, 은하수 등 제주도의 비경이 대부분이지만 4·3 때 불에 타 없어진 '잃어버린 마을'도 있고,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풍속을 보여주는 사진들도 보인다.
효소차를 마시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사진작가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이기도 한 제주토박이 허범 임관표씨다. 임 작가의 사진인생을 듣다 보니 그가 시나 수필을 쓰게 된 것도, 발효차 카페를 낸 것도 모두 일맥상통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임 작가가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시절 일본에 사셨던 작은아버지가 카메라를 선물로 보내온 데에서 비롯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카메라 취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지속됐다. 술·담배를 하지 않다 보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걸핏 하면 카메라를 들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사진 관련 책을 보면서 독학으로 카메라 기술을 익히던 그는 결혼을 하면서 또 다른 카메라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장인이 유명 서예가이자 화가였는데,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미 사진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아내와 장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진관에 직원으로 들어가 상업사진을 찍으며, 촬영 조명 암실작업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임 작가의 사진인생은 2011년 또 한 차례 전환점을 맞는다. 건강이 안 좋아 고향인 서귀포 중문에 내려와 쉬고 있던 어느 날 꿈에 꾸찌뽕 열매가 보였다. 꿈에 보았던 공원을 찾아갔더니 정말로 꾸찌뽕이 있더라는 것이다. 각종 성인병과 암에 효과가 있다는 꾸찌뽕 나무였다.
이때부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산야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발효에 눈을 떴다. 한라산 일대를 누비며 산야초를 채취하고 이를 발효시켜 효소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건강도 많이 회복했고, 발효음료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2015년부터 제주대 평생교육원에서 산야초 효소 강의를 시작했다.
임 작가는 제주도 전역을 누비고 다니면서 산야초를 찾으면 사진으로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 4·3 현장과 관련 유적지, 제주의 문화유산 등 기록할 가치가 있는 대상들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정리해 모두 2만여 점을 보관 중인데, 그중 육지 사진 5천여 점을 제외한 약 1만 5천 점이 제주도를 찍은 것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368개 오름을 거의 모두 찍었다는 임 작가는 가장 멋진 작품으로 용눈이 오름, 따라비 오름, 백약이 오름을 꼽았다. 용눈이와 따라비는 부드러운 곡선이 아름답고, 백약이엔 이름 그대로 약초가 많이 자란다고 한다.
사진작가가 말하는 제주 인생사진 포인트
임 작가에게 제주도에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한라산은 가을 단풍이 물들었을 때 영실 계곡의 기암을 찍으면 작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선작지왓의 철쭉과 윗세오름, 겨울 백록담 등을 아름다운 촬영 포인트로 꼽았다.
한라산 사진을 재미있게 찍는 방법으로 중산간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촬영해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한라산의 백록담 분화구 모양이 왕관 형상인데, 각 중산간 마을에서 쳐다보면 그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귀포에서 한라산 정상을 보면, 왕관 모양이 아니라 사람이 길게 누운 형상으로 보이고, 반면 애월읍 봉성리 마을에서 보면 가장 아름다운 왕관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밖에 임 작가가 오름 촬영 포인트로 꼽은 곳은 구좌읍 송당리의 아부오름이다. 아부오름 분화구에 물이 고였을 때 보이는 한라산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한다. 또 애월읍 어음리에서 한라산을 찍으면 서부지역의 오름들을 모두 한 앵글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제주에서 딱 한군데 애월읍 고내리에서는 한라산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제주도에서의 사진 촬영이 육지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느냐고 물어봤다. 임 작가는 제주도는 하루에 한 장소에서 일출과 일몰 풍경을 모두 찍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산과 들과 바다를 멀리 이동하지 않고도 짧은 시간에 모두 촬영할 수 있다는 점이 육지와 가장 다른 특징이라고 말한다. 특히 소와 말이 있는 목가적 풍경을 촬영하는 데는 최적화된 사진 천국이라고 강조했다.
요즘 제주 곳곳마다 인생사진을 찍겠다는 젊은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임 작가에게 인생사진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단순히 경치가 멋지다고 너도나도 몰려가서 찍는다고 인생사진이 되는 건 아닙니다. 똑같은 배경에서, 똑같은 포즈를 하고 찍은 사진이 아닌, 나만의 감성이 살아 있는 사진을 찍어야, 비로소 인생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임 작가 스스로는 어디를 자신만의 인생사진 포인트로 여기고 있을까.
첫째로 꼽은 곳이 항몽유적지 토성 위에서 은하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다음으로 아침이나 저녁에 바리메 오름 주차장에서 노꼬메 오름을 찍으면 물에 비친 오름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노꼬메 반영(反影) 사진이다.
마지막으로 꼽은 건 애월해안도로에 있는 구엄리 돌염전이다. 현무암이 평평하게 펼쳐진 곳에 찰흙으로 둑을 쌓고 그곳에 들어온 바닷물이 햇볕에 마르면서 생기는 소금을 얻던 곳이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바닷가 날씨 변화에 따라 멋진 인생사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사진촬영 나갈 때 혼자 다닌다고 한다. 좋은 촬영을 하려면 피사체에 집중해야 하므로 혼자가 좋다고 한다. 그리고 한밤중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길 좋아한다. 요즘 은하수를 찍는 데 꽂혀 있기 때문이다. 368개 오름을 배경으로 은하수를 찍는 게 꿈이다. 현재 20컷의 은하수 사진을 찍었다.
야간촬영을 많이 한 까닭에 에피소드도 많다. 노루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자동차에 노루가 부딪친 적도 여러 차례다. 한밤중 은하수가 보이는 동남쪽 전갈자리와 오름을 한 앵글에 잡기 위해 숲속을 헤매기도 했다.
그가 사진작가이자 시인, 수필가인 이유
임 작가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자 수필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시집도 출간한 바 있다. 사진 하나만 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시와 수필까지 쓰냐고 물었더니, 이 세 가지가 긴밀히 연관돼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인즉, 산야초를 찾아다니며 제주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면 그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서부터 4·3 피해에 이르기까지 내력을 알게 돼 나중에 수필의 소재가 된다는 것이다.
사진 갤러리 카페를 새로 오픈해서인지 요즘 이곳은 제주지역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아온다. 또 제주도에서 멋진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육지 손님들도 적지 않다. 임 작가는 제주의 비경을 찍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직접 현장에 함께 가서 촬영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할 예정이다.
아무튼 제주의 비경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카페가 바로 지척에 생겼으니 반가운 일이다. 오늘은 사진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다음엔 임 작가가 사진 못지않게 애착을 갖는 산야초와 효소 이야기를 들어볼 참이다. (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