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이렇게 뜨거워야 벼도 익고 과일도 익지."
9월인데도 날씨가 너무 뜨겁다며 불평을 할 때면 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다. 그런데 올해는 내 생애 처음으로 가을 장마를 본다. 가을비가 아닌 가을 장마는 쨍한 햇빛 대신 서늘한 비와 구름을 선사했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채솟값 걱정을 해보았다.
아마도 올해 초 파값 파동을 겪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파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온 국민의 시선을 파값으로 쏠리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에는 종목을 가리지 않고 모든 물가가 일제히 상승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이번엔 '추석 물가'에 가을 장마까지 겹쳤으니 물가가 치솟을 거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또 일부에선 최근 지급하기 시작한 재난지원금이 물가 상승률을 부추길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집에서 늘 밥을 해먹고는 있지만 장바구니 물가에 일희일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요즘 장을 보러 가면, 몇 가지만 담아도 5만 원이 훌쩍 넘으니 영 기분이 별로다. '집값도 오르고 기름값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는데 월급만 그대로'라는 철 지난 한탄이 하고 싶은 것은 아닌데, 다른 건 몰라도 식재료 값이 자꾸 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조금 불안해진다.
먹거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물가가 오르면 밥상을 조금 단출하게 차리면 되는 문제이고, 더군다나 추석이 다가온다고 한들 나는 차례를 지내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추석 물가에 그리 민감한 편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식재료의 가격에 이렇게 유난히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바로 먹거리의 가격이 아닌 먹거리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 즉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우려 때문이다.
농산물 가격 상승은 그 원인으로 보면 기름값이 오른다거나 집값이 오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기름값이나 집값 등은 여러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지만, 농산물 가격은 그 해의 작황에 따른 것이라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까닭이다.
이번 농산물 가격의 주요 상승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올여름의 폭염과 때늦은 가을장마라고 한다. 기후변화는 꾸준히 예고되어왔고, 그 경고음을 도처에서 울려댔지만, 사실 눈앞에 실제적으로 보이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육식 문화가 탄소 배출 요인이 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오늘 하루 고기 먹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플라스틱이 지구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오늘도 예쁜 쓰레기를 사고 1회용 용기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고기를 사는 순간, 천둥이나 번개가 친다면 모를까, 아마도 수치로만 확인할 수 있는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 때문에 오늘의 고기를 포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밥상물가라는 것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비가 와야 할 때 오지 않았고, 비가 오지 말아야 할 때 비가 많이 와서 평소보다 작황이 부실했다는 결과가 단지 올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어쩌면 매년 되풀이될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를 보며 식량문제를 떠올리다
지금은 치솟은 농산물 가격을 이야기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하늘 같은 농산물 가격에도 불구하고 먹을 수 있는 식재료 자체를 구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 미래는 어쩌면 내 머릿속에서만 그려지는 엉뚱한 상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몇 년 전 보았던 <인터스텔라>(2014)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과학적 지식을 전제로 한 영화이고, 때문에 스마트한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난 이 스마트한 영화에서 과학적 원리보다 그들의 식량문제가 눈에 띄었다.
이 작품은 전 세계적 식량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지구가 급속한 기후변화와 심각한 병충해로 인해 작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지는 상태, 그 심각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심각한 식량부족 상태에서 지구인들은 과학이나 우주는커녕 금융이나 부동산, 일자리 등등을 논할 여유가 없었다. 영화는 어떻게든 당장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해 모두 농업에 열중하게 된 시대를 보여줬다.
나는 인터스텔라가 보여주는 어려운 과학적 원리보다, 지구가 식량이 부족해진 행성이 되었다는 그 전제가, 그 합리적 가능성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물가가 치솟는 현상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기에, 높아진 물가에 지구의 식량 위기까지 대입한 것이 조금 선을 넘은 상상일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미래가 아니라 어차피 맞이할 미래라고 생각한다면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 이제부터라도 기후 문제에 자발적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파 값만 올라도 '파테크'가 시작되는데, 높아진 물가와 기후변화를 연결해서 이참에 지구를 위해 '기후테크'에 한번 도전해 보는 시도, 꽤나 센스 있고 멋진 일일 것 같은데 말이다.
가을 장마에 때아닌 상심에 빠져 있으려니, 난데없이 지난해 비싸서 못 담가 먹었던 파김치에 대한 식욕이 맹렬하게 솟구치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쩌나, 집 앞 마트에서는 파가 너무 비싸 못 사겠다는 엄마의 말에 식욕이 한풀 꺾이고 잠시 실망이 스쳤지만, 괜찮다. 이 아니면 잇몸이라고, 이번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근처 재래시장에 '쪽파 나들이'라도 한번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