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피고인 송기복에 대한 공소사실 중 국가보안법위반(간첩등)의 점 및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한 각 공소사실의 요지는 별지 기재와 같고, 위 각 공소사실은 위 판시 3, 다. 및 라. 항에서 본 바와 같은 이유로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에 따라 피고인 송기복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등)의 점 및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하여 모두 무죄를 선고한다."
2009년 8월 28일 서울고등법원(제1형사부)은 송씨 일가에게 내렸던 국가보안법 위반 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안기부에 연행된 지 26년 만의 일이었다.
1982년 9월 10일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는 한국전쟁 당시 충북도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후 남파된 송창섭에게 포섭돼 서울과 충북을 거점으로 25년간 간첩 활동을 해왔다며 송기복의 처와 아들을 포함한 28명의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따르면 송지섭과 송기준은 재북간첩 송창섭에게 포섭되어 대동입북, 간첩교육 후 재남파 되었고, 나머지 친인척 관계였던 피고인들 중 한경희는 정계, 송지섭은 군사, 송기준은 산업계, 송기섭은 공무원 등에 침투하여 국가기밀을 수집, 보고하였다. 특히 대학에 재학중이었던 송기복의 자녀들까지 동원하여 학원 동향을 수집 보고하였다고 했다.
고정간첩 29명 일망타진
서울, 충북 거점 25년간 지하공작
전 공화당 간부, 대학교수, 공무원 등
12명 구속, 4명 불구속 나머지 훈방
- 1982. 9. 10 매일경제신문 11면
간첩단 29명 검거
안기부 발표 혈연 중심 25년 암약... 12명 구속
공작금 1억 8천만 원 받아
- 1982. 9. 10 동아일보 11면
재북 거물 송찹섭 7차례 침투
혈연 고정간첩단 전 공화 간부, 대학 교수 등 포섭
월북 밀봉교육 때 "총장" 약속 받기도
- 1982. 9. 11 조선일보 11면
특히 1982년 9월 10일 경향신문 기사 중 '지식인 포섭 사회혼란 책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번 사건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북괴가 대학 교수, 정당 요직자, 공무원 등 지식인을 포섭, 대남 간첩으로 이용하는 교활한 술책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안기부가 10일 검찰에 구속 또는 불구속 송치한 고정간첩단 16명의 개인별 범죄사실과 인적사항 등은 다음과 같다"라며 사건과 관련된 송씨 일가의 이름과 나이, 개인 경력을 자세히 서술했다.
국정원과거사위원회 보고서(과거와대화 미래의성찰, 2007, 국정원과거사위원회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안기부의 명백한 조작이었다.
- 당시 안기부는 수사결과의 허점, 불법장기구금 사실, 고문과 가혹행위의 문제 등이 불거지고 대법원이 2차레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자 사건 담당 재판부에 다양한 압력을 행사해 유죄 판결을 유도하고자 했다.
- 이상과 같이 당시 공소사실의 핵심전제가 사실이 아니고 제출된 증거는 사실과 다르다. 또한 참고인들의 증언이나 관련자들의 피의자신문조서는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증인들의 증언이 조작 또는 강요에 의한 허위진술임이 밝혀졌다. 또한 관련자들의 유죄 판결을 유도하고자 재판부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도 밝혀졌다.
안기부는 송씨 일가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수사 단계에서 불법구금과 고문 등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된 증거를 재판부에서 인용하도록 압력까지 행사했다. 이것이야말로 법치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언론에 의해서도 이들은 악독한 범죄자가 되었다. 피해자들은 그 피해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사건 났을 때 아이들은 막내가 3학년이고 큰애가 4학년이었나봐. 우리 아들이 교실에 막 우유를 다 쏟고 다닌다는 거야. 아들이 텔레비전을 다 본 거야. 그리고 그거 기억나요. 우리 막둥이 딸아이가 영어 웅변대회가 있다고 영어 원고를 하나 써 달라고 그러더라구. 아빠가 감옥에 있는 건 아는 거지. 그래서 영어 원고로 하나 써 줬지. 나중에 아빠, 2등 했다고 그래. 그런데 선생님이 부르더니 사실은 니가 1등이었다 이거야. 근데 아빠 땜에 안 된 거지. 아이~ 참 감방에서 그 말 듣고 참 밤새 울었지
- 송ㅇ수, 1982년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전국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 조사 2020. 1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우리 아들 녀석이 '아빠, 간첩이야?' 그래서 지금도 그 생각하면 참 환장해요. 사건이 4학년 초에 그런 거 거든요. 신림동에 삼성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얘가 4월에 반장이 돼가지고 얘들 잘 따라주고 그랬는데 갑작스레 인제 뭐 간첩의 아들이다, 간첩이다 이러니까 애들이 패고 도시락에다 모래 넣고 발로 차고 막 그랬대. 우리 집사람이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전학을 가야 되겠다 해가지고 시흥 지하로 간 거예요. 거기서 학교를 다니니까 공부 잘하던 애가 안 하더라구요.
인제 나가 보니까 아빠 간첩이야? 딱 그러는 거예요. 한 이틀 동안 울었어. 아들보고 그래 가자 내가 (아들) 손을 잡고 (친구집으로)갔어요. (친구 집에)가서 나하고 동네 유지들 모임에 있는 사람 아들, (아들이 나를) 그 집으로 데리고 가는 거야. 내가 딱 나타나니까 그 애 아버지도 놀랜 거지. 내가 그 집 아들한테 간첩 아니라고 판명이 돼서 이렇게 나왔으니까 늬들은 옛날같이 잘 지내라 했더니 그 꼬마아이가 우리 아들한테 잘못했더라고 빌더라구. 그랬더니 우리 아들이 걔를 때리더라구. 그래서 그러면 안 돼 이래놓고, 그 애 아버지한테는 미안하네, 하고 헤어지고는 왔더니 아빠, 이제 열심히 공부할께 이러더라구요.
- 송ㅇ홍, 1982년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전국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 조사 2020. 1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보원 내 과거사위원회였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발전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송씨 일가 사건에 대한 당시의 언론 발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 문제점이 가장 증폭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발표문과 보도자료다.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경우 안기부가 보도자료를 작성하여 언론에 배포한 행위는 피의사실 공표죄를 위반하였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는 보도자료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피의사실 공표죄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보도자료에 방대한 수사기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확인 되지 않은 내용이나 허위의 사실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 2007년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 학원, 간첩편
이는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안기부, 현 국정원 스스로도 언론의 발표에 많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점의 여러개의 예를 들고 있다. 그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
한 예로 보도자료를 보면 "한경희는 정계, 송지섭 군사, 송기준은 산업계, 송기섭은 공무원, 한광수, 송기복은 학원 등에 침투, 국가기밀을 수집"하였으며 "대학에 재학중인 자녀들까지 간첩 조직에 끌여들여 학원 동향을 수집 보고해 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관련 피의자들의 직업을 마치 이들이 관련 분야에 조직적으로 침투한 것처럼 부풀린 것으로, 발표문을 보면 이들이 해당 분야에 조직적으로 침투하여 체계적으로 관련 분야의 기밀을 빼 낸 것과 같은 인상을 주거나 실제 공소장이나 의견서에 제시된 혐의사실은 이런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중략)
당시 송기준의 4자녀 중 3인이 각각 이화여대,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송기준의 수사기록 어디에도 송기준이 이들 자녀들을 통하여 학원가의 동향을 수집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안기부는 KBS와 MBC를 동원하여 <간첩사건 보도자료 촬영지시>라는 영상을 만들어 보도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안기부의 지시내용은 "신문, TV, 라디오 등 전 언론매체에 대하여 각 언론사의 특성별로 뉴스기사, 사설, 해설, 논단 등 확대 보도조정"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체적으로 "KBS, MBC 지방국 기자를 대동 VTR로 현장을 촬영한 필림을 1982. 7. 10 까지 각 본사로 우송, 사전 편집에 차질 없도록 할 것"이라는 구체적 지침을 내렸다. 실제 이 보도는 9월 10일 이후 보도로 실현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언론은 안기부의 보도지침에 철저히 속박되어 있던 때인데, 간첩 분야의 보도에서는 그 속박 정도가 더욱 심각하여 그야말로 공안기관에서 불러주는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받아쓰는 수준의 보도와 논설을 내보냈다.
송기복씨는 국정원 발전위원회의 발표가 있던 날 <시사인>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쉴 새 없이 전화를 해대는 언론사 기자들을 향해 "왜 날 인터뷰합니까, 날 잡아가둔 사람들을 찾아서 혼내는 게 언론이 할 일 아닌가요?"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25년 전 이 사건을 1면 톱 기사로 다르며 호들갑을 떨었던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의 기자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 2007.10.29 시사in 이오성 기자
여전히 피해자들은 수사기관 뿐만 아니라 언론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과거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던 언론은 억울함을 벗은 피해자의 현재의 처지 역시 중요하게 다뤄야 하지 않을까?